얼마 전 발송되어 온 이동통신사의 청구서를 무심코 뜯어보다가 화가 났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구서에는 신청한 적도 없는 벨소리 부가서비스 요금 2000원이 버젓이 써 있었다. 게다가 작년부터 지금까지 총 16000원이란 돈이 내 계좌에서 소리도 없이 인출된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출시될 때 휴대폰에 내장되어 나오는 벨소리만 사용해 온 나로서는 도대체 신청한 적도 없는 휴대폰 부가서비스 요금이 어찌하여 청구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동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였다. 그러나 담당자는 벨소리 서비스를 신청한 사실이 분명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신청해 놓고 잊어버린 것이 아니냐며 나에게 잘못을 전가하려 하였다. 몇 분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끊고 말았다.
몇몇 사람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했더니, 자신도 그러한 피해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이 제법 됐다. 처음에는 공짜로 제공하다가 통지도 없이 유료로 전환해 버린다든지, 콜센터 직원의 교묘한 질문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부가서비스 사용에 동의케 한다든지의 부당한 사례를 쏟아냈다. 가끔씩 뉴스에서 이동통신사들이 부가서비스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계산을 해보자. 내가 가입한 이동통신사가 보유한 가입자수는 대략 2400만명이라고 한다. 월 2천원의 부당한 요금 청구가 가입자의 5%에게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이통통신사는 한달에 24억원 (2천원 * 2400만명 * 5%) 이라는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꼴이 된다. 나처럼 요금청구서 내역에 무심하여 8개월이 넘도록 부당청구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고객을 속여 벌어들인 이익은 아마 수백억원 이상이 될 것이다. 벨소리 다운로드 같은 부가서비스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고정적일 것이다. 즉, 그 서비스를 1명이 이용하건 2400만명이 이용하건 이미 소요됐고 앞으로 소요될 비용은 동일하다는 사실에 비춰보아,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은 이동통신사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이득이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불공정한 행위가 발생하는 것일까? 고객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가능한 한 많이 챙기라는 것이 이동통신사의 내부방침은 아닐 텐데 - 부디 아니길 바란다 – 왜 이런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일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순진한 생각인데, 진짜로 이동통신사의 실수일 수 있다. 수천만명의 가입자를 관리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부당이득 절취사건이 주변에서 꽤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단순한 업무상의 과실로 야기되었다고 덮어버리기엔 뭔가 조직적인 사전모의가 있었다는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 나는 '성과주의의 그늘'을 본다. 성과주의가 우리에게 가져준 폐해의 전형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벨소리 부가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부서와 직원들은 지속적인 매출 향상의 압박을 1년 내내 24시간 받고 있을 것이다. 연봉제니 BSC니 하는 것들이 안 빠지는 날이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사는 텔레마케터 또한 매니저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귀가 따갑도록 실적을 내라는 훈화를 듣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방으로부터 성과를 향상해라, 실적을 높여라, 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고객이 동의하지 않은 부가서비스를 은근슬쩍 임의로 신청해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견디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의 실적 향상 여부가 급여에 적극적으로(?) 이어질수록 유혹의 크기는 커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화려하게 소개되어 이제는 거의 정론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과주의, 그것이 가져다 준 어두운 그늘인 것이다.
요즘 많은 기업들이 윤리경영을 이야기한다. 윤리적인 기업이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으며 윤리적이지 않으면 잘 나가다 갑작스레 도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 윤리경영이 내세우는 화두다. 이른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있어 기업의 윤리적인 경영활동은 기업생존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우월적인 지위를 악용하여 동의치 않은 이득을 취하는 것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강탈해가는 절도행위나 다름없다. 천문학적인 매출액에 비해서 ‘새 발의 피’ 정도의 불과한 액수일지는 몰라도 그와 같은 부당행위를 방치하다가 언젠가 회사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스캔들로 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다녔던 컨설팅회사까지 망하게 만든 엔론 사태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는 성과주의 경영과 윤리경영, 이 두 개의 경영철학을 어떻게 하면 함께 추구할 수 있을까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과주의경영에 윤리경영을 접목하는 시발점은 성과를 좋은 성과, 나쁜 성과로 확실히 구분하여 이를 조직의 규범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좋은 성과, 즉 윤리적인 틀 내에서 공정하게 달성한 성과에 대해서만 보상해야 하며, 비윤리적인 범법행위에 의해 쌓아 올린 ‘나쁜 성과’에는 절대 보상하지 말고 오히려 철저히 배척하고 엄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이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윤리적 토대 위에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와 잣대를 다시금 구축해야 하며, 이를 우직하게 밀고 나갈 CEO의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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