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 전쟁 중에 하노이 힐턴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미국의 장교 짐 스톡데일 장군의 이름을 딴 말이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수용돼 있으면서 4년간의 독방 생활과 수십 차례의 모진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전쟁포로를 보호하기 위해 체결된 제네바 협약은 그곳에서 무의미한 선언에 불과했다. 포로로서의 권리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정해진 석방 날짜 없이 끝도 모를 전쟁을 이겨내야 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포로 생활 중에 숨을 거뒀지만, 그는 미국의 장성으로서는 유일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생환의 비밀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음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풀려날 희망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으며, 결국에는 빠져나와서 나중에 그 끔찍한 경험을 내 생의 전기로 전환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낙관주의자들은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오면 나갈 수 있을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버리면 부활절이 오면 나갈 수 있겠지,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상심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갔습니다.”
비전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우리는 보통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좋은 것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 잘 될 거야. 좋은 날이 올 거야.” 라며 위로하지만 결국 이러한 말은 오히려 현실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변치 않을 운명으로 굳어 버리게 만들고 현실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영원히 꺾게 만들 수도 있다. 상상만으로 좋은 날은 오지 않는다. 스톡데일이 참담한 상황을 이기고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근거 없는 희망을 버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단기적인 목표를 끊임없이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 낸 것에 있다.
이처럼 비전이란 멋들어진 몇 마디의 문구로 꾸민 장밋빛 미래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낙관주의로 비전을 치장해서는 안 된다. 스톡데일의 사례처럼, 올바른 비전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노력으로 달성이 가능한 미래를 설정하도록 한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비전은 원칙을 제시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생애 동안 무수한 난관에 접한다. 비전은 우리에게 가능한 한 그러한 난관에 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난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려주기 위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경기 추락으로 매출과 이익이 급감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때 우리 회사의 비전 선언서를 들춰보라. 가격을 낮춰라, 공급업체를 바꿔라, 등등 당장에 실행할 묘책은 분명 그곳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전에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준수해 가야 할 원칙이 명기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델타 항공의 비전은 ‘세계인의 항공사로 선택 받는다.’ 라는 아주 짧은 말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함의되어 있다. ‘세계인의...’ 라는 문구에는 적극적인 신규노선의 개척과 타 항공사와의 제휴 영업이라는 사업의 방향이, ‘항공사로...’ 에는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항공 수송이라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 투자할 것이라는 의지가, ‘선택 받는다...’ 에는 고객, 주주, 사원들에게 선택 받을 수 있도록 탁월한 서비스, 높은 투자수익, 성과지향의 근무환경을 제공하겠다는 목표가 숨어 있는 것이다.
비전은 행동에 몰입하도록 한다. ‘쇼생크 탈출’ 이란 영화에서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가석방되어 나올 감방 동료에게 돌 밑에 숨겨 둔 쪽지로 말했듯, 물론 ‘희망이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탈출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매일 실천에 옮겼다는 것에 있다. 그의 희망은 본인의 억울함이 알려져 언젠가는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결코 아니었다.
영화의 압권은 속임수를 당한 교도소장이 반쯤 닳아 없어진 숟가락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희망이란 매일매일 조금씩 숟가락으로 벽을 파내는 것이었다. 비전의 힘은 우리를 경쟁자로부터 구별 짓게 하는 맨 밑바닥의 동력, 바로 숟가락으로 벽을 파도록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때때로 비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다.
사방이 깜깜한 한밤중에 길을 갈 때 가장 반가운 것은 무엇일까? 손에 들고 있는 랜턴일까? 아니다. 그것은 겨우 발밑만 비춰줄 뿐이다. 가장 반갑고 고마운 것은 바로 저 멀리 보이는 민가의 불빛이다. 비전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절실한 것이다. 절망을 추스르고 어둠 속을 헤쳐가게 하여, 결국은 우리를 살리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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