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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장치인 라우터 생산으로 시작한 기업, 시스코(Cisco)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1987년 즈음 설립된 이 회사는 한때 마이크로소프트를 능가하는 시장 가치를 자랑하던 인터넷 시대의 총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98년에 시장가치가 1,000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20년이 걸려서 도달한 일을 10년 만에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존 챔버스(John Chambers)가 CEO로 영입된 1995년 이후에는 5년 동안 주주가치가 4,500억 달러나 증가됐는데 이것은 매일 2억 5천만 달러(약 2,500억 원)에 해당하는, 실로 폭발적인 성장이었습니다.
미디어는 당연히 이런 시스코를 칭송하기 시작했죠. 1997년에 <포춘>은 시스코를 컴퓨터 업계의 새로운 강자라고 말하면서 '번개 치듯 발 빠른 기업 인수를 통해 네트워킹 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라고 시스코를 추켜 세웠습니다. 1998년에도 시스코가 '인터넷의 진정한 왕'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죠. 존 챔버스가 수십 개의 기업을 인수합병하고 통신기기 시장으로 진출할 때 핵심사업을 벗어나는 마구잡이식 성장이라는 비판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매체들은 그런 경영 방식을 다른 기업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례로 연일 소개하며 칭찬했죠. <포춘>은 시스코의 탁월한 인수합병 능력이 핵심성공요소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러 경영대학원에서도 시스코의 사례를 통해 인수합병의 성공전략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죠. 제프리 페퍼를 비롯한 경영학자들도 시스코 성공 비결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많은 책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존 챔버스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에 집중하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시스코는 없다'는 식으로 시스코의 성공을 미화했죠.
이렇게 시스코를 칭찬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시스코가 쇠락하자 태도를 180도 바꿨습니다. 시스코는 2000년 3월에 총 시장가치가 5,550억 달러에 도달하고 주가가 80 달러에 이르는 정점을 찍었지만, 2000년 말이 되자 주가는 38달러까지 폭락했고 2001년 4월에는 14달러로 주저 앉았습니다. 1년 만에 4,000억 달러의 시장가치가 증발해 버린 겁니다.
그러자 <포춘>은 "시스코의 성공요소라고 알려진 모든 것이 허위로 판명되었다" 며 비난 대열에 나섰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시스코를 칭송했다는 기억은 없다는 듯이 "시스코가 자만감에 취했고 통신시장을 기웃거리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열렬히 비판했습니다. 존 챔버스의 경영 방식도 상찬의 무대에서 끌어내려져 도마 위에 올려졌죠. <포춘>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위크>, <월드베스트CEO> 등도 가세했죠.
언론 매체의 가혹한 평가를 받던 시스코는 2003년이 되자 실적이 호전됐고 2007년에는 주가가 33달러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금융 위기 때인 2009년엔 14달러로 떨어졌지만 2010년에는 24달러로 올랐죠. 앞으로 시스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2000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지, 아니면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처지에 놓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언론의 평가입니다. 어떤 기업이 잘 나갈 때는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최고경영자를 경영의 귀재라고 추켜세우면서 성공의 비결을 찾는 데에 호들갑을 떱니다. 하지만 그 기업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최고경영자를 잘 나가던 기업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취급하죠. 그 기업을 성공하게 만든 비결이 사실은 '잘못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결함투성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동일한 경영자, 동일한 요소에 대해 이렇게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기업이 두각을 나타내느냐 추락하느냐의 차이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언론(주로 경영관련 잡지)의 평가, 경영학자들의 case study, 소위 성공기업을 주제로 한 책을 접할 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일한 경영자와 경영방식이 성공할 때는 성공요소로, 실패할 때는 실패요소로 얼굴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사실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 모 커피 체인점이 급부상하면서 그 기업의 성공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오고 여러 잡지에도 소개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성공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포장되어' 나오는 성공 스토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안 될 말이긴 하지만, 언젠가 그 기업의 성장이 정체되거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면, 동일한 경영자와 동일한 경영 방식에 대해 찬사의 나팔을 거두고 비난의 꼬챙이를 들고 달려들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언론이나 매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예측 가능합니다. 수많은 사례가 이미 귀납적으로 이를 증명해 왔고 앞으로도 꽤 오랫 동안 그러할 테니까요.
(*참고도서 : '헤일로 이펙트', '상식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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