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목마와 숙녀   

2011. 5. 5.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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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목마와 숙녀
 
 
 
입김 한줄기가 얼어붙는다
검은 길을 여는 눈먼 자동차들이 검은 바퀴 자국을 남길 때
방울소리조차 잃은 눈먼 목마는 다가와
검은 별로 떠난 숙녀의 시절을 이야기한다
 
 
가고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하여
혹은 내게서 잊히지 않았을 맹세에 대하여
검은 숨을 토하며 목마는 잊으라 한다
 
 
숙녀의 별은 이미 술잔 속에서 사라졌노라고
대륙을 달리는 바람처럼 스치어 오고 스치어 갈 뿐이라고
검은 여류시인의 늙은 손가락에서조차 기억되지 않노라고
 
 
별이 사라진 술잔 안에서 슬픈 통증이 떠오른다
슬픔의 질량...
 
 
검은 목도리를 한 채로 검은 잠에 빠질 때
기울인 술잔에서 별이 떨어질 때
우리가 바라보던 숙녀의 검은 눈동자는
시절의 어둠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잊혀진 대로 사는 일이 인간의 숙명인 것을
그저 회고록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쓸쓸한 것을
은하의 변방에서 울리는 방울소리처럼 아득한 것을
 
 
상심한 뱀이 늦가을의 절망을 피해 은둔하듯
우리는 늙은 숙녀의 눈에 입을 맞춰야 한다
쓰러진 술병을, 쓰러진 인생을 소리없이 기억해야 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모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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