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은퇴하는 내가 되자   

2008. 3. 2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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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TV를 켜니 한 노부부가 넓고 넓은 푸른 잔디 위에서 나란히 골프를 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말했다. “이게 바로 대통령 골프야. 자, 봐. 이 넓은 골프장에 우리 밖에 없잖아.” 부인은 이렇게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수긍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늘은 말 그대로 새파란 물감을 뿌린 듯했고 이따금 흘러가는 흰 구름이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곱게 늙어가는 노부부의 웃음은 청정한 공기만큼이나 맑게 들렸다.

노부부는 은퇴 후의 생활을 고민하던 끝에 필리핀의 ‘바기오’라는 고지대에 위치한 소도시에 정착했다. 남자는 한국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뒤 직장을 다니다가 IMF 위기 때 불어 닥친 감원태풍에 휩쓸려 직장을 잃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50대 초반. 새로운 직장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던 그는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꿨다. ‘무엇하러 내가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하는가, 새 직장에 들어간들 몇 년이나 다닐까, 이럴 바에 나에게 남은 30년 정도의 여생을 즐기며 살 방법을 찾자.’ 그래서 그가 3년 정도의 사전 답사를 통해 찾아 낸 곳이 먼 이국의 땅이다.

1년 내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깨끗한 날씨와 늘 푸른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TV 속 노부부의 생활을 본다면, 십중팔구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리라. 각박해지고 치열해지는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 스트레스로 찌든 위장 속으로 쓴 술을 넘겨야만 겨우 살 것 같은 심정. 퇴근길에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모르는 사이 차거나 기운 달을 보게 되면 훌훌 털고 멀리 떠나고픈 욕구. 그러나 차마 털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달관한 듯 스스로에게 웃어 보이는 가난한 마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1년에 한두 번쯤은 이런 감정에 휩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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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다


나는 특정한 직장에 매어있는 피고용자 신분이 아니라서 직장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 있는 편이다. 컨설팅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나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제법 가질 수 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을 수 있고, 당일로 가능한 여행도 가고, 아니면 그저 멍하니 공상을 즐길 수도 있다.

나의 직업을 부러워하는 직장인 친구들이 있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자유시간 동안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컨설팅 프로젝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앞으로의 사업계획에 골몰하게 돼버리며, 제안서를 제출한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을까로 초조하게 돼버리기 때문이다. 퇴근을 해서도 노트북을 켜고 앉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 내일 할 일을 미리 생각해 놓지 않으면 잠을 뒤척인다.

누구는 이런 나를 ‘일중독자(Workaholic)’라고 폄훼하듯 말하곤 한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직업상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나 스스로에게 변명해봤자 소용없는 일임을 안다. 사는 것은 나인데 어떨 때는 일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숱한 일들이 정신과 육체를 점거한 듯하다. 자신에 대한 철저함이 지나쳐 정서와 감성이 말라버린 우물처럼 텅 빈 듯하다.

어느 날 문득, ‘느린 삶’을 살아가는 TV 속 노부부를 보며 퍼뜩 정신을 차린 후, 이런 마음을 먹었다. “매일 은퇴하는 내가 되자”라고.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하얀 포말이 생겨났다 부서지는 바닷가에 서있기도 하고, 푸른 잔디에 누워 느린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을 보기도 하고, 안개에 묻힌 섬을 한가로이 노니는 내가 되어 보기로 한다. 일 따위는 이제 하지 않아도 돼. 내일이 오기 전까지 생의 가장 금쪽같은 서너 시간동안 난 은퇴했으니까 말이지. 내일 일은 걱정하지 않아. 오늘의 쉼이 소중할 뿐이야.

누군가가 말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의 의미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상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자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 매일 은퇴하는 ‘내’가 되자. 나는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삶은 나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줄 것이다. 그래서 온전히 싱싱한 ‘나’로 다시 태어나자. 그것이 각박하고 치열한 우리들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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