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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에겐 눈[雪]을 나타내는 단어가 50개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평생을 눈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터라 누구보다 눈의 미묘한 특성들을 잘 잡아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문장을 보고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다거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의 뇌 속에는 ‘에스키모 어휘 허풍’이라는 밈(meme) 하나가 깊게 침투한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눈에 대한 에스키모의 어휘 능력은 사실이 아니다.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가 에스키모에게는 눈을 지칭하는 단어가 4개라고 한 말이 와전되고 과장됐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에스키모만큼이나 눈을 다양하게 부를 줄 안다. 진눈깨비, 함박눈, 진창눈, 싸락눈, 소낙눈, 가루눈 등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에스키모 어휘 허풍은 왜 그렇게 널리 퍼진 걸까? 그것은 바로 밈이라는 제2의 복제자 때문이라고 이 책 '밈'의 저자인 수전 블랙모어는 주장한다.
(서평 책, '밈')
그녀는 더 나아가 인간의 뇌는 다른 영장류에 비해 왜 이렇게 큰지, 인간은 왜 언어라는 고도의 의사소통 도구를 갖게 됐는지, 왜 어떤 종교는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반면 특정 종교는 국지적인 한계를 갖게 됐는지, 왜 우리는 한 순간도 생각을 멈출 수 없는지 등과 같은 난제들을 밈의 개념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헌데 밈이 도대체 무엇일까?
밈(Meme),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책인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을 이렇게 정의한다.
“노랫가락, 발상, 캐치 프레이즈, 복식의 유행, 항아리를 만드는 방법이나 아치를 건설하는 방법처럼 모방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문화의 요소가 밈이다.”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에서 부르는 생일축하송이나 우리나라 축구경기가 열리는 운동장에서 메아리 치는 ‘대~한민국’이란 구호,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비법 등이 바로 밈의 예이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유전자가 밈이다. 밈을 제2의 복제자로 부르며 유전자와 동격이라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노래, 구호, 관념, 노하우들이 부모와 자식에게 유전자가 전달되는 것처럼 사람들 간에도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밈은 왜 복제되어 퍼지는 걸까? 그 까닭은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모방능력에 있다. 남의 행동과 생각의 ‘패턴’을 따라할 수 있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물론 침팬지가 흰개미집에 작대기를 집어넣어 개미를 낚고, 원숭이들이 흙 묻는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는 동료의 행동을 따라 한다는 사례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극 증강’에 의한 사회적 학습이지 모방은 아니다. 사회적 학습은 남을 관찰함으로써 환경에 대해 뭔가를 배우는 것(고구마를 씻어 먹는 하나의 행동)인 반면, 모방은 남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행동에 관해 뭔가를 배우는 것(음식을 씻어 먹는 게 미각과 건강에 좋다는 깨달음)이다. 이 둘은 매우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또 하나의 진화론, 밈 선택설
인간의 모방능력 덕택에 밈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복제될뿐더러 인간을 ‘선택’하기도 한다. 유전자의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체의 진화가 일어나듯이 ‘밈 선택’을 통해서도 인간의 진화가 일어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인간의 뇌 크기가 바로 밈 선택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모방에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모방할지 결정하는 기술,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변환하는 기술, 적절한 육체적 행동을 해내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이 얼마나 정교하냐에 따라 모방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데, 모방을 잘 해낼수록 생존력(환경적응력)이 커지고 짝짓기의 대상으로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모방능력을 발휘하고 밈 확산에 알맞도록 큰 뇌를 가지게 됐다고 블랙모어는 주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밈이 무엇인가 의도(예를 들어, ‘인간이 뇌를 크게 만들자’)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오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밈에게는 목적이란 게 없다. 자신을 뇌 속에 담으며 숙주 노릇을 하는 인간에게 관용을 베풀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을 더 많이 퍼뜨리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도킨스가 유전자는 이기적이라고 했듯이 밈도 이기적이다.
인간이 언어를 갖게 된 이유 역시 밈의 이기적인 측면에서 비롯된다. 언어는 밈을 겉으로 드러내어 전승(복제)시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디지털’ 도구이다. 밈의 입장에서 보면 과묵한 사람보다 수다스러운 사람을 더 좋아한다. 수다스러워야 밈이 더 잘 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도록 인간을 재촉했고, 언어를 말하기 위해 음식을 먹으면서 숨쉬기를 동시에 할 수 없는 해부학적인 위험을 감수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힘의 중심에는 밈이 있다.
인간의 뇌가 커진 이유, 언어를 갖게 된 까닭 등에 대한 블랙모어의 설명은 인간의 진화에 밈 선택이 유전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때로는 유전자를 구속한다는 개념에 기반한다. 그래서 개인의 관점에 따라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특히 저자의 ‘밈학(學)’은 유전자에 가해지는 자연선택의 힘이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에 반(反)한다.
하지만 블랙모어는 인간의 뇌가 생물학적 이득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게, 지나치게 크게 자랐다면서 출산의 위험(머리가 크면 출산 시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위험)과 같은 대가를 치르면서 그렇게 된 이유를 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밈을 유전자와 동격의 복제자로 인정해야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인 진화 모두에 대한 설명력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북모닝CEO와의 인터뷰 모습)
밈을 둘러싼 공방, 밈으로 맞선다
밈이 우리의 뇌 속을 지배하고 우리가 밈에 조종당하는 ‘밈 머신(meme machine)’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거나 종교적인 사람에게는 수용되기 어렵다. ‘자아’는 밈들의 복제를 돕기 위해서 생겼다는 말은 책을 읽는 내내 의문부호를 불러일으키는 주장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행동, 이념을 위해 목숨을 불사르는 결의와 같이 내 의지로 결정한 일들이 사실은 밈이 자신을 퍼뜨리려는 노력의 부산물일 뿐인가?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나 자유의지란 개념은 과연 허구일까? 우리는 그저 밈을 실어 나르는 숙주에 불과한가?
저자는 이러한 독자들의 예상되는 반발에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녀는 ‘자아는 망상’이라고 오히려 강하게 말한다. 거짓된 자아에 속지 말라는 뜻이다. 게다가 ‘진실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나’는 손을 뗀 채 결정이 스스로 내려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아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개념에 기초한 희망과 욕망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괴로움을 낳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괴로움의 주범인 자아에 복무하도록 하지 말고, 수많은 밈들이 현명하게 의사결정 내리도록 “그저 맡기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말한다. 이 주장 역시 큰 논쟁거리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이 우리의 신념이나 종교관과 배치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저자의 주장을 매도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며 자아라는 개념이 수많은 밈들이 복잡하게 얽힌 ‘밈플렉스(memeflex)’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에 맞서려면 역시 과학적 증거를 통해 반박해야 옳다. 그러려면 저자의 ‘밈학’이 어떠한 과학적, 논리적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초기 개념을 폭넓게 확대 적용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과, 밈은 그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허구일 뿐이라며 밈학을 백안시하는 사람 모두 읽어야 할 책으로서 매우 가치가 크다. 밈에는 밈으로 맞서야 한다. 1999년에 쓰인 책이 이제야 번역된 점이 아쉽다.
이 책은 ‘밈을 지지하는’ 일종의 밈이다. 이 밈이 훌륭하게 자신을 복제해 갈지, 아니면 도태될지 두고 볼 일이다. 내기를 한다면, 지금으로선 전자에 돈을 걸고 싶다.
(* 이 글은 교보문고 북모닝 CEO에 오늘 자로 발행된 서평입니다. 원제 '문화를 전달하는 유전자, 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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