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혹은 늦어도 11월 무렵이면 어김없이 이런 풍경이 펼쳐집니다. 회의실마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고, 화이트보드에는 복잡한 숫자와 그래프가 빼곡합니다. 조사와 분석, 그리고 끝을 모르는 마라톤 회의의 연속. 바로 ‘내년도 사업계획서’를 수립하는 시즌의 익숙한 모습이죠.
시무식 날,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CEO와 임직원들은 파이팅을 외치면서 "올해 목표를 달성하자!"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만들어낸 사업계획서가 각자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에 어느 컨설턴트의 분석에 따르면, 임직원 1,000명 규모의 기업이 연간 사업계획서를 수립하는 데 들이는 비용이 대략 10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임원과 실무자들의 인건비, 회의 시간, 외부 데이터 구매 비용 등을 합친 기회비용인데요, 사업계획서 한 페이지에 들인 비용이 자동차 값과 맞먹을 정도로 매우 비싸죠.
여러분 회사의 사업계획서는 그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업계획서의 본질은 불확실한 미래를 '항해'하는 데 든든한 '길라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인데요, 작년(2025년) 말에 수립했던 여러분 회사의 사업계획서를 한번 들여다보세요. 현재 글로벌 경제를 강타하고 있는 '미국-이란 전쟁으로 인한 유가 급등'이라는 돌발변수를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나요? 거의 그렇지 않을 겁니다(연간 사업계획 수립 과정이 엄청난 자원을 낭비할 뿐, 환경 변화에 맞는 의사결정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꾸준히 지적하는 문제임).

이런 식의 돌발변수가 터지면 기존 사업계획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그때부터 '숫자'를 맞춰 가는 데 급급해집니다. 3월이 지나고 5월이 되어도, 환경 변화를 반영한답시고 계속해서 엑셀의 수치만 변경하면서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 소모적인 작업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말이죠.
사업계획서가 제대로 된 가치를 발휘하려면 관점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계획서 안에 담긴 장밋빛 가정들이 언제든 '틀릴 수도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그 해답을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에서 찾습니다. 사업계획서에 담긴 여러 가정에서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면서도, 동시에 가장 예측하기 힘든 가정 2가지를 도출하세요. 이를 교차하면 4가지의 미래 시나리오가 나오는데요, 현재 우리가 수립한 사업계획서가 특정 시나리오에만 '몰빵'되어 있지 않은지, 반대로 어떤 시나리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빵꾸'가 나 있는지를 치열하게 검증해야 합니다.
훌륭한 사업계획서는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어떤 미래가 닥치더라도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된 '다양한 미래의 대본'이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성과를 지키고 더 큰 도약을 이뤄내려면 말이죠.
일상에서 실천하려면 이렇게 해보세요. 여러분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 '가장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 조건(가정)' 한 가지를 뽑으세요. 그리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기 바랍니다. "만약 이 가정이 완전히 틀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짧은 질문 하나가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크게 높일 것이라 장담합니다.
*참고기사
https://hbr.org/2006/01/stop-making-plans-start-making-deci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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