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했던 자동차가 재미없는 차가 되는 이유   

2025. 5.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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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 오래전에 자동차 회사의 상품기획실에서 일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동차의 컨셉트를 설정하는 게 주업무라서 어떤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아야 하는지도 주요 의사결정 사안이었지요. 물론 그때는 신입사원 시절이라 선배들의 일을 보조하는 수준이었지만, 제 입장에서 상당히 이상하다고 느꼈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사결정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아주 혁신적이었던 디자인이 그렇고 그런 디자인, 평범하기 그지없는 디자인으로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인 연구소에서 내놓은 초기 프로토타입대로 충분히 자동차를 제조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또 소비자들이 자신만의 개성을 뽐낼 자동차의 출현을 매우 기다린다는 것을 내부에서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디자인 시안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변하더니 개성이 별로 없는 디자인으로 ‘전락’하는 일이 잦았죠.

 

아마도 여러분이 일하는 조직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질 텐데요,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위로 올라갈수록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바보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 ‘자기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섹시했던 컨셉트가 이도저도 아닌 컨셉트로 무너지는 것이죠. 

 

 

첫째, 리스크 회피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결정권자일수록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하기에 모험적인 선택’보다 구성원이나 고객에게 ‘욕먹지 않을 선택’을 합니다. 대담한 디자인은 자칫 "너무 튄다", "시장 반응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줄어들고, 안전한 선택이 채택되고 말죠.

 

둘째, 합의 중심의 조직 문화 때문입니다. 합의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마케팅, 개발, 영업 등 다양한 부서가 의견을 내면, 결국 가장 뛰어난 디자인보다는 가장 반대가 적은 디자인이 살아남기 마련이죠. 모든 부서가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끼는 대안이 선택됩니다. 욕 먹기 싫으니까요.

 

셋째, 의사결정자가 비전문가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나 사용자 경험(UX)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영자들이 의사결정하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왜 이런 디자인이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익숙한 것과 안전한 것을 우선하고 말죠.

 

넷째, 과거의 성공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새로운 고객 가치를 타겟으로 하는데, 많은 조직들이 과거의 성공 경험을 기준으로 미래지향의 아이디어를 평가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잘 해온 방식을 앞으로도 잘될 방식으로 오해하고 말죠.

 

다섯째, 책임을 분산하려는 심리 때문입니다. 의사결정 사다리를 올라가면 최종적인 책임 소재가 희미해집니다. 그 중 누구도 ‘이 디자인이 맞다’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기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그저그런 디자인으로 수렴하고 맙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직 내의 의사결정 사다리를 사안마다 바꿔야 합니다. 모든 의사결정 사안이 동일한 사다리로 올라가도록 하지 말고, 디자인 결정이 올라갈 사다리, 예산 결정이 올라갈 사다리, 마케팅 이벤트 결정이 올라갈 사다리를 달리 해야 합니다. 모든 걸 ‘사장’이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는 ‘전문성’을 우선하는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합리성을 가장한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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