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접착제)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2024. 3.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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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는 워크맨, 데크와 소형 음향기기 수리를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열 번을 고치면 6~7번 가량은 스스로 어깨를 으쓱할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만, 워낙 제 수리 실력이 근본 없이 여기저기에서 주어 들은 것으로 이뤄졌기에 도중에 중단하거나 아예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실패는 학습의 왕도라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아주 뼈아픈 실수로 새삼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겠습니다.

 

Braun이라는 브랜드를 말하면 대부분 면도기를 떠올리지만, 한때는 오디오 업계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네임 밸류가 있던 기업입니다. 특히 유명 산업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의 디자인으로 알려진 곳이죠. 과거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가 디터 람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저는 Braun의 앰프와 카세트 데크, 라디오 등을 가지고 있는데, 저에게 마음대로 쓸 돈이 충분하다면 집 안 가득콜렉팅하고 싶을 만큼 수집욕을 자극하는 브랜드입니다.

 

워낙 오래된 제품(50년대 ~70년대)이라 여기저기에 병을 달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날 무슨 ‘만용’이 솟구쳤는지 선반 위에 놓인 앰프를 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앰프는 나름 괜찮은 소리를 내주었는데 차츰 좌우 볼륨의 차이가 크게 벌어졌습니다. 오른쪽에서 소리가 나긴 하는데, 왼쪽에 비하면 음량이 50%도 안 됐습니다. 게다가 이 앰프에는 입력 소스를 선택하는 버튼이 제대로 눌러지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눌린 채로 고정되지 않고 다시 빠져나오는 통에 애를 먹었습니다. 아주 살살 누르면서 속으로 ‘제발 고정돼 다오’라고 간절한 마음을 실어야 겨우 고정됐습니다.

 

그간 워크맨 같은 소형 기기만을 고치다가 무게가 20kg가 넘는 앰프를 분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크기가 커서 각 부품의 위치와 상태가 눈에 잘 띄였습니다. 버튼이 제대로 눌리지 않는 이유는 고정에 쓰이는 스프링과 걸쇠 등에 먼지와 기름때가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죠. 먼지라도 닦아야겠다고 했다가 우연히 발견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알콜을 열심히 뿌려가며 깨끗이 닦아내니 눌러도 잘 고정되지 않았던 버튼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고정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정말 ‘나는 천재로구나!’라고 자찬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때 저는 앰프의 뚜껑을 닫아야 했습니다. 눈에 무엇이 씌였는지 ‘왜 이 버튼 캡에는 유격이 있지? 캡과 버튼 사이에 유격이 없도록 하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뭔가 느슨해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죠. 저는 순간접착제를 써서 약간씩 흔들리는 버튼 캡을 고정시켜 버렸습니다. 정말 그러면 안 됐는데도!

 

순간접착제가 다 굳은 걸 확인하고 앰프 뚜껑을 닫아 전원을 연결하니,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왜 이러지? 손보기 전에도 소리는 나왔는데? 소리 출력 쪽은 만진 적도 없는데?’ 그때 쾅~하고 뇌리에 뭔가가 내리꽂혔습니다. ‘버튼 캡의 유격에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그건 유격이 아니라 어떤 버튼이 선택됐는지, 선택되지 않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공간’이었던 겁니다. 옛날 기기들이 디지털 기기가 아니라 아날로그 기기임을 망각한 탓이었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저는 순간접착제로 굳어버린 버튼 캡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게 붙어서 전혀 떨어지지 않았죠. 칼을 사용해도, 바늘을 써도, 아세톤을 뿌려봐도 한번 붙어버린 버튼 캡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천치로구나!’ 저는 제 머리를 여러 번 쥐어박으며 자학했습니다.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지만) 아끼는 앰프를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감정은 좌절에 가까웠죠. 저는 결국 버튼의 캡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강력하게 붙어있는 탓에 니퍼와 ‘뻰치’를 써서 뽀개는 방법밖에는 없었죠. 디터 람스 옹에게 뭔가 죄를 짓는 듯한 심정으로 버튼 캡을 뜯어내는 제거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앰프는 손보기 전의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버튼 캡들이 다 빠져버려 앙상해진 앰프의 소리는 왠지 처량했습니다. 

 

순간접착제를 한번 쓰면 직전의 상태로 되돌리기기 어렵습니다. 직전 상태로 되돌리려면 무언가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죠. 저는 순간접착제를 바르기 전에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습니다. ‘이걸 발라서 붙이면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데 그래도 괜찮은가?’라고. 이 질문의 답은 ‘아니오’가 분명했지만, 멍청하게도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결정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순간접착제로 붙이기와 같은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 있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이 있죠. 두 결정 중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이냐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둘 중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버튼 캡의 유격을 순간접착제로 붙이자는 결정(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 유격의 용도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해서는 안 될 나쁜 결정’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순간접착제를 쓰는 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야.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은 없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면, 순간접착제가 아니라 쉽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테이프로 버튼 캡을 고정시켜 보자고 결정했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앰프 소리가 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면 ‘아, 이 유격은 없애면 안 되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으며 테이프를 제거했을 테죠.

 

되돌릴 수 있는 결정과 되돌릴 수 없는 결정,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결정보다 자주 해야겠다는 게 뼈아픈 실패로부터 얻은 메시지입니다. 조직 운영을 하며 전략이나 내부 제도 등을 결정할 때, 개인이 자기 삶에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할 때 ‘이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 아닌지, 혹시 되돌릴 수 있는 결정이 존재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그 결정의 파급효과가 크다면 꼭 그래야 합니다. 옛 금성사의 광고카피처럼, 순간(접착제)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니까요!  (끝)

 

P.S. 저는 요즘 그 캡을 구하려고 이베이를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의 후유증이 참 크네요, (3D 프린팅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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