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동안 일드(일본 드라마) 보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변두리 로켓>, <저물어 가는 여름>,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런치의 앗코짱>, <천황의 요리사> 등을 봤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드라마 스타일이 좋더군요. 5편 내외의 짧은 연속극이지만, 드라마의 여백이 충분하고 할 이야기는 다 하고 넘어갑니다. 억지로 '러브 라인' 같은 걸 넣지 않아서 더욱 좋죠. 막장 코드와 신데렐라 코드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배우들의 과도한 음성 데시벨과 표정이 난무하는 한국 드라마와 비교하니, 조미료 안 들어간 담백한 음식을 먹는 듯 합니다.
또한, 이런 일본 드라마들은 기업과 경영자의 경영철학 관점에서도 좋은 참고서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연휴 동안 본 일드 중에서 <변두리 로켓>은 특히 경영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드라마였습니다. 주인공인 ’츠쿠다 제작소’의 츠쿠다 사장은 원래 일본항공우주센터에서 로켓 엔진을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는데, 본인이 책임지고 개발한 ‘세이렌’이란 엔진의 결함으로 발사된 로켓이 궤도를 이탈하는 바람에 폭파시켜야 했던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발사 실패의 책임을 지고 퇴사한 후에 츠쿠다는 아버지가 물려준 츠쿠다 제작소의 사장으로 부임하지만, 여전히 로켓 엔진 개발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본업 외에 로켓 엔진 밸브 개발에 투자하고 결국 특허까지 취득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 모든 줄거리를 말할 수 없지만, 이 5편짜리 짧은 드라마 시리즈가 경영에 주는 시사점을 요약하고자 합니다(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니, 드라마를 보시고 각자 시사점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드라마는 기업 경영에 있어 ‘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츠쿠다 사장은 로켓 엔진 밸브 개발에 주력하느라 다른 제품 개발과 판매에 조금은 무감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를 본 직원들은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엔진 밸브 개발에 ‘미친’ 사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죠.
이러한 불만은 ‘나카시마 정기’라고 하는 악덕기업이 츠쿠다 제작소의 기술을 버젓이 카피해 놓고 오히려 츠쿠다 제작소가 자기네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건 후에 더욱 커지게 됩니다. 나카시마 정기는 소송을 질질 끌며 자금난에 허덕이는 츠쿠다 제작소가 저절로 항복을 선언하면 주식을 양도 받아 자기네 산하에 두려는 심산이었습니다. 츠쿠다 사장은 주거래은행을 찾아가서 자금 융통을 부탁하지만, 지점장이란 사람은 ‘은행도 비즈니스다’를 말하며 외면합니다. 오랫동안 거래해 왔고 츠쿠다 제작소의 역사와 철학을 잘 아는 은행임에도 단칼에 자금 대출을 거부하죠. 중소기업 하나쯤 도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은행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비즈니스 측면으로 본다면, 지점장의 말처럼 은행도 돈을 벌고 리스크를 회피해야 할 입장이기에 츠쿠다 제작소의 요청을 거부하는 게 맞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은행이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사채업자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요? 거대 은행의 눈에는 수많은 중소기업 중 하나라서 ‘망해도 우리는 괜찮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중소기업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대기업들이 장악하는 시장이 된다면, 과연 은행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걸까요? 주거래 은행이라면 업체를 재무제표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경영자가 어떤 꿈을 지니고 있는지, 그 꿈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 꿈이 실현되도록 하려면 은행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질문 던져야 하지 않을까요? 업체가 잘 나갈 때는 은행 돈 좀 대출하라더니 업체가 어려워지면 나몰라라 발을 빼는 것은 은행 스스로 자기네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은행이 있다면, 경영철학의 천박함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겠죠.
츠쿠다 사장은 본인의 꿈 때문에 직원들이 불만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합니다. 경영자의 길이 ‘꿈을 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직원들의 밥벌이를 보존시키는 것인지’를 놓고 번뇌합니다. 그는 직원들에게 기업은 꿈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설득하지만, 당장 회사가 도산할 수 있는 마당이라 츠쿠다 사장의 설득은 직원들에게 먹히지 못합니다.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이렇게 회사가 재무적으로, 그리고 법무적으로 위기인 상황에서 로켓 엔진 밸브와 같은 꿈을 잠시 보류하는 게 좋을까요? 쉽게 답할 질문은 아닙니다. 일단 생존해야 꿈이고 뭐고 꿀 수 있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꿈이 있어야 기업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여러분은 어떤 견해인가요? 드라마를 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은행의 역할을 다시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이 자금상 어려움에 빠져서 꿈을 추구하기에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 꿈을 보호하는 것이 은행의 임무 아닐까요? 기업주와 직원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무시할 일일까요?
두 번째가 경영에 주는 시사점은 ‘제국 중공’이라는 대기업 내의 의사소통 문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국 중공의 CEO는 로켓 개발 프로젝트를 지시하는데, 순수하게 자체 기술과 부품으로 로켓을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합니다. 로켓 기술이 앞선 외국 업체들의 갑질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게 이런 원칙을 세운 이유였죠. 헌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중요 부품인 엔진 밸브에 대한 특허를 츠쿠다 제작소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거죠. 프로젝트 총괄 책임을 맡은 자이젠 부장은 난감해 하던 끝에 츠쿠다 사장을 만나 제국 중공에 특허를 팔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하면 CEO가 세운 원칙을 그나마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죠. 츠쿠다 사장은 거액의 특허 매각 대금을 제안하는 자이젠 부장의 말에 고민에 빠집니다. 자금 부족에 숨통을 틀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츠쿠다 사장은 제안을 거부하고 자기네가 부품을 공급하도록 해달라고 역제안을 합니다. 자신과 직원들이 개발한 기술을 그렇게 쉽사리 내놓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거죠. 이 때도 직원들은 츠쿠다 사장의 결정에 불만을 갖습니다. 거액이 들어오면 생활의 안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데, 사장이 멋대로 고집을 부린다고 봤기 때문이었죠. 제국 중공의 자이젠 부장은 본성이 착한 사람이고, 츠쿠다 제작소를 견학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터라 엔진 밸브를 공급 받는 쪽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거대기업의 의사소통 문제, 그 전형을 보았습니다. 제국 중공의 관리자들은 ‘100% 자체 부품으로만 로켓을 개발한다’는 CEO의 원칙에 누를 끼칠까봐 츠쿠다 제작소가 특허을 가지고 있다고 CEO에게 보고를 못하고, 츠쿠다 제작소의 엔진 밸브 기술이 세계 최고이니 부품을 공급 받는 것이 좋다는 것조차 CEO에게 보고를 못합니다. 자이젠 부장과 CEO 사이에 위치한 본부장은 CEO의 심기를 건드리면 본인 출세가 지장을 받을까만 전전긍긍하죠. 그 때문에 로켓 개발 일정에 차질이 예상되는데도 말입니다. 의사소통에 있어 ’옥상옥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반면, 츠쿠다 제작소는 츠쿠다 사장과 영업부장, 경리부장, 사원 대표 등이 모두 한 테이블에 모여서 늘 토론하는 모습을 드라마에서 보입니다. 서로 갈등하면서 큰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그런 갈등이 개인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생겨난다는 점을 구성원 모두 공감하고 있었죠. 이런 공감과 목적 일치가 바로 ‘신뢰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국 중공의 관리자들(자이젠 부장, 본부장, CEO)이 특허 문제를 발견하고 바로 테이블에 모여 이마를 맞댔다면, 쓸데없는 눈치를 보면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지 않았을 겁니다. 100% 자체 기술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의 밑바탕에 무엇이 있었는지 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업이 커지면 어쩔 수 없이 의사결정 단계가 많아지고 ‘게이트 키퍼’도 많아지며 의사 전달의 왜곡이 많아지는, 관료주의가 만연해집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막고 대비하는 것이 CEO의 주요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CEO라면 명심할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술적 우위가 있다면 중소기업이라 해도 큰 소리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제국 중공은 츠쿠다 제작소의 엔진 밸브를 공급 받기 전에 자기네들이 정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이것은 자이젠 부장을 견제하려는 본부장과, 야심이 지나친 토미야마의 계략이었습니다. 일부러 테스트를 상당히 어렵게 해서 츠쿠다 제작소의 부품 공급이 아니라 특허 사용 쪽으로 돌리려는 것이었죠. 토미야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 중공의 테스트팀은 츠쿠다 제작소를 방문해서 생트집을 잡으면서 직원들을 참담케 만듭니다.
이때, 직원들 중 하나가 ‘우리처럼 세계 최고의 엔진 밸브 기술을 가진 기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회사라면, 우리도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낮게 평가한다면, 그들의 실력 역시 형편없다’는 역발상적인 마인드는 바로 엔진 밸브라는 우수한 자체 기술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 말고도 우리의 엔진 밸브를 다른 회사(외국 기업)에 납품할 수 있다’라는 것은 기술 기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자신감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술은 츠쿠다 사장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함께 추구한 꿈에서 비롯된 것이죠. 거대 기업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힘(회사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도)은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기술에서 나옵니다.
이 밖에 이 드라마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는데, 츠쿠다 제작소를 괴롭히던 나카시마 정기가 중간에 소송을 취하하고 오히려 화해금을 물게 된 이유에서 또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츠쿠다 제작소를 변호하던 변호사(츠쿠다 사장의 전 부인의 친구)는 인맥을 동원하며 나카시마 정기의 작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신문에 내도록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기사의 크기는 고작 손바닥보다 작았지만, 나카시마 정기는 기업의 위신에 먹칠이 칠해졌다는 인식으로 소송을 취하하고 판사의 화해 권고도 수용하죠. 악덕기업이긴 했지만 염치를 알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기업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나라 기업 같으면 어떨지, 대입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 창출’이라고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하는 문화에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는(혹은 법을 몰래 위반해서라도) 뭐든 해도 좋다는 인식이 어느새 우리나라 산업계를 물들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기업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 짧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깊은 울림 중 하나입니다.
제국 중공에 테스트 제품을 보낼 때 일부러 불량품을 보낸 직원(츠쿠다 제작소의)에게 츠쿠다 사장이 보인 행동은 약간 ‘닭살스러운’ 측면도 없지 않지만 직원의 실수를 벌 주는 것보다 너그러이 감싸는 것이 장기적으로 윈-윈 할 수 있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불량품을 보내는 바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제국 중공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음에도 츠쿠다 사장은 왜 그 직원을 벌 주지 않았을까요? 그건 직원의 방법은 옳지 않았지만 그 의도가 ‘선’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원은 제국 중공의 테스트에 떨어진 후에 제국 중공으로부터 특허 사용료를 받는 것이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단독으로 행동했던 겁니다. 츠쿠다 사장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그 의도를 먼저 살필 줄 아는 경영자로서 귀감을 보입니다.
드라마는 츠쿠다 제작소의 엔진 밸브를 단 로켓이 하늘을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었고, 츠쿠다 사장은 새로운 꿈(인공심장 밸브 개발)을 향해 또 나아갑니다. 꿈을 잃거나 모르고 그저 돈을 버는 데 급급하다면 ‘좀비기업’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 꿈이 기업의 진정한 존재 목적임을 <변두리 로켓>은 일본 드라마 특유의 잔잔한 구성과 절제된 대사 속에서 웅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본 <변두리 로켓>은 2011년에 방영된 것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2015년에 리메이크된 드라마에서 얻은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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