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있는 더 좋은 해법을 못찾는 이유   

2013. 3. 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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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정보를 객관적으로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론 체계에 매우 영향 받는다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기존의 증거 위에 형성된 전문가들의 이론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갖춤새(Einstellung) 효과'라고 부릅니다. 기존의 것들에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고착되어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튀빙겐 대학의 메림 빌라릭(Merim Bilalic)과 동료 연구자들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갖춤새 효과가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빌라릭은 체스 실력이 평균인 자들로부터 국제 수준의 마스터에 이르는 자들까지 실험 참가자로 모집한 다음, 이미 어느 정도 게임이 진행된 체스판을 보여주고 '외통 장군(mate)'를 선언하기 위한 가장 짧은 수를 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체스판 위에 놓인 말들은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이라면 다섯 수만에 장군을 외칠 수 있음을 아는 '익숙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국면에서는 다섯 수가 아니라 세 수만에 외통 장군을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사람들에게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었죠.


이렇게 '메이트!'를 외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가 존재하는 상황을 제시했더니, 국제 마스터 수준의 체스 선수들은 익숙한 수를 바로 찾아냈지만 익숙하지 않은 수(하지만 더 짧은 수)를 찾아낸 선수는 5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준마스터 수준의 선수들 중 더 짧은 수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빌라릭이 체스의 말 하나를 옮겨 놓아 외통 장군을 부를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하나인 체스판을 제시할 때는 준마스터 이상의 선수들이 모두 그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방법이 2가지일 때는 익숙한 수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방법이 오직 1가지일 때는 그런 편향 없이 바로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는 뜻입니다.


빌라릭은 수를 찾기 위해 체스판 위를 탐색하는 참가자들의 눈동자 운동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세 수만에 외통 장군을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섯 수에 장군을 부를 수 있는 '익숙한 경로'에 눈동자의 움직임이 고정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떤 상황에 딱 맞는 방법(혹은 딱 맞다고 믿어지는 방법)이 발견되면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미 적합한(혹은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방법이 있으면 더 나은 대안을 탐색하는 데 드는 시간이나 비용을 아깝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고정된 생각이 혁신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혁신은 기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조직이나 시스템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얻기 힘듭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갖춤새 효과는 빌라릭의 실험에서 봤듯이 새로운 관점을 채택하라고 요구해도(혹은 가지려고 노력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전문가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해법이 가장 좋은 해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걸 일단 제쳐두고 더 나은 해법을 찾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비록 힘들지만) 갖춤새 효과를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혁신은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참고논문)

Bilalić, M., McLeod, P., & Gobet, F. (2010). The Mechanism of the Einstellung (Set) Effect A Pervasive Source of Cognitive Bias.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19(2), 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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