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보고서나 핸드아웃을 복사하여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사무실에 한 대 밖에 없는 복사기에 왠일인지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회의시간이 다가오면서 초조함을 느끼던 여러분은 앞의 사람에게 "제가 복사를 먼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하고 싶지만 그가 거절하거나 기분 나빠 할 것을 염려하여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렵습니다.
엘렌 랭어(Ellen Langer)는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왜냐하면'이란 말을 뒤에 붙이면 앞의 사람이 "먼저 복사하세요."라고 말할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혔습니다. 랭어는 학생을 시켜 복사기 앞에 줄을 선 사람에게 다가가 "실례합니다. 5페이지 짜리 문서를 복사해야 하는데 제가 먼저 쓸 수 없을까요?"라고 물어보도록 했는데, 약 60퍼센트의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차례를 양보했습니다.
이번엔 '왜냐하면'이란 말을 붙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했습니다. "실례합니다. 5페이지 짜리 문서를 복사해야 하는데 제가 먼저 복사할 수 없을까요? 왜냐하면 제가 좀 바쁘거든요."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94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양보했습니다. 사실 '왜냐하면'이란 말 뒤에 붙은 이유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바쁘기 때문에 순서를 양보해 달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멍청한 이유'를 둘러대도 이런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실례합니다. 5페이지 짜리 문서를 복사해야 하는데 제가 먼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제가 복사해야 하거든요."라고 물어봐도 93퍼센트의 사람들이 자기 순서를 양보했습니다. 복사해야 하는 것이 먼저 복사해야 하는 이유라는, 아무 의미 없는 이유를 말해도 '왜냐하면 효과'는 컸던 겁니다.
5페이지 밖에 안 되는 소량이라서 터무니 없는 이유를 갖다 대도 자기 차례를 순순히 양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랭어는 20페이지 짜리 문서로 늘려서 동일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왜냐하면'이란 말없이 양보를 부탁하자 24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자기 차례를 내어 줬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복사를 해야 하거든요."라는 멍청한 이유를 붙여보니 이때는 양보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혀 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왜냐하면 제가 아주 바쁘거든요."라는 그럴듯한 이유(하지만 그리 좋지는 않은 이유)를 대니 양보율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이 결과는 사람들이 어려운 부탁을 받을수록 부탁하는 자가 말하는 이유에 더 큰 비중을 가지고 들어줄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랭어의 실험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거나 부탁할 때 반드시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설득의 원칙 하나를 일깨웁니다. 큰 부탁일수록 이유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알려주죠. 하지만 랭어의 실험에서 얻어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를 상대방도 알고 있으리라 짐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간명할수록 상대방에게 '왜냐하면'이란 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교훈을 필히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 글에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댓글을 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참고논문)
Ellen J. Langer, Arthur Blank, Benzion Chanowitz(1978), The mindlessness of ostensibly thoughtful action: The role of "placebic" information in interpersonal intera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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