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있는 동전을 살려라   

2008. 5. 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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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한번쯤 이런 기억이 있을 겁니다. 빨간 돼지저금통에 10원짜리, 100원짜리를 넣을 때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돼지저금통이 다 차면 '맛난 것을 먹어야지, 어디에 놀러 가야지' 하며 설레이던 때가 누구나 한번쯤은 있겠죠.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10원짜리도 꽤 유용한 돈이었습니다. 웬만한 과자 하나는 쉽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100원짜리 몇개만 있어도 하루 종일 먹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릴 적 동전은 그 소유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풍요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자 하나 사먹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미래의 작은 꿈을 위해 고사리같은 손으로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곤했죠.

그런데 요즘은 10원짜리는 어디가나 푸대접을 받습니다. 50원짜리, 100원짜리도 마찬가지죠. 그나마 대접받는 것은 500원짜리인데 그것도 점점 그 효용가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버스나 지하철도 500원짜리가 두 개는 있어야 탈 수 있으니까 말이죠. 요즘 은행에서는 자기네 고객이 아니면 동전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기껏 돼지저금통에 열심히 동전을 모아서 은행에 가면, 옛날엔 '저축을 열심히 하는 분이군요'라는 찬사(?)를 받았었지만, 요즘엔 은행원의 차가운 시선을 안 받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몇년 전, 나는 집구석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동전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상상 외로 그 액수가 크더군요. 자그마치 5천 3백 4십원이었습니다. 그 만큼의 돈이 우리집 구석구석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집안 곳곳에 숨어있는 동전을 찾아보세요. 애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동전, 화장대 서랍 속에 잠자는 동전 모두를 말입니다. 만일 돼지저금통으로 동전을 저금하고 있다면 그것도 포함시켜서 모두 얼마나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몇천원 쯤은 족히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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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연합뉴스


'돈'이라는 말은 '돌고 돈다'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5천3백4십원의 돈은 돈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돈은 유통이 되면서 효용을 창출하고 교환되어야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5천3백4십원의 돈을 잠재웠을 때의 효용은 '0'이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 유통시켰다면 적어도 5천3백4십원 만큼의 효용을 발생시킵니다. 효용을 발생시키지 않는 '죽은 돈'은 가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로 봐서도 '손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돼지저금통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전도 죽은 돈입니다. 물론 나중에 돼지를 잡을 때쯤 제법 많은 돈이 쌓여 있어서 그것으로 더 큰 효용을 위해 쓰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돼지저금통을 은행에 가지고 가면 차가운 시선만 받을 뿐입니다. 집에서 잘 저축했다고 이자를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동전을 집에 잠재우고 있는 것은 막대한 손실입니다. 10원짜리 하나 만드는데 원가가 10원이 넘는데 그것들이 유통되지 않고 집안 곳곳으로 숨어 들어가니 그만큼의 돈을 다시 찍어 내느라 손실이 큰 것이죠. 국민 1인당 잠자고 있는 있는 동전의 액수가 1000원만 된다고 가정해도 4천8백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국가적 손실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전은 이제 저축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즉, 이제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차곡차곡 모으는 일은 아이들에게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든지, 우리가 어릴적 추억을 떠올려서 재미삼아 해본다든지 등의 의미 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동전을 별 생각없이 모아두거나,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지 말고 잘 써야 하지 않을까요? 동전을 집안에 잠자고 있게 하지 말고, 들어오는 즉시 잘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전을 마구 써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요지는, 동전은 절대로 방치하거나 많이 모아두거나 하지 말고 효용가치가 발생할 수 있도록 제때제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전을 써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마시고 싶지 않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동전이 쓰여야 할 곳에 잘 쓰자는 것이죠.

그 동전의 액수가 얼마정도 된다고 이렇게 호들갑이냐, 라고 하실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식당의 밥 한끼 값이 얼만데, 하시며 동전을 세고 있는 사람의 '짠돌이' 행각에 비웃음을 던지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생활 습관을 조사한 글에서 보면, '작은 돈을 잘 쓴다'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활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작은 돈이라도 '죽어있거나', '별 이유없이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들은 '큰 돈'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돈'을 더 잘 다루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점원이 책과 함께 플라스틱 캔 모양의 저금통을 함께 주더군요. 그 저금통을 이리보고 저리 돌려보니, 그 안에 동전을 모으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빈 저금통으로 남겨 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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