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뼈를 몰래 버린 사연   

2010. 12. 17. 09:00



어떤 사립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사장은 한 달 중 하루를 '잔반 없는 날'로 운영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날 만큼은 급식에서 나오는 잔반을 줄여서 환경 보호에 일조하자는 좋은 의도에서 내린 지시였겠지요.

헌데, 잔반 없는 날에는 퇴식구에서 잔반 수거통을 아예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이사장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 내린 것인지, 아니면 밑의 사람들이 과도하게 충성하느라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 그대로 그날은 잔반 없는 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잔반 없는 날에 반찬으로 나온 메뉴가 하필 생선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선생님, 생선 뼈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답니다. 비록 잔반 없는 날이라지만 생선 뼈까지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선생님은 "그것은 못 먹으니까 그냥 모아서 버려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사장이 식당으로 시찰을 온다는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잔반 없는 날이 잘 지켜지는지 직접 눈으로 감독하려는 의도였겠죠. 선생님은 아무리 생선 뼈라지만 잔반이 버려지는 광경을 이사장에게 발각되어 꾸중이라도 들을까 싶었습니다.

그는 몰래 검은 비닐봉투를 구해 와서 생선 뼈를 거기에 버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 밖으로 가지고 나가 생선 뼈를 버렸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라 세부내용은 차이가 있겠지만, 이렇게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알다시피 사립학교에서 이사장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자랑합니다. 교원의 '임면'을 쥐락펴락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립학교도 있지만) 이사장의 말은 그대로 법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검은 비닐봉투에 생선 뼈를 모아 버리게 한 교사를 보고 "생선 뼈라서 잔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사장에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그 사람 참 융통성 없다"고 핀잔을 줄지 모릅니다. 소위 '알아서 기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교사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그런 기지로 위기를 모면했다니, 잘 했다"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칭찬을 해줄 겁니다. 이사장의 눈 밖에 나면 좋을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범접 불가능하고 반론 제기가 용납되지 않는 권위가 조직의 융통성과 창의성을 훼손하고 저하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이야기처럼 사실 그대로 말하면 될 것을 권위자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한 경험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권위자가 있다면 그 권위가 크건 작건 밑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며 행동한다는 느낌을 한번 이상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왕적인 리더십은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이끄는 강력한 동력입니다. 그리고 제왕적인 리더 한 사람이 모든 의사결정을 휘어잡는 조직에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융통성 없을 정도로 리더의 말에 순종하는 게 '진화적으로' 가장 유리한 생존전략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강력한 권위가 조직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점이고, 그 동력이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나면 '순종 전략'은 가장 불리한 생존방식이 된다는 점이겠죠.

생선 뼈를 검은 비닐봉투에 모아 따로 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사립학교 이사장은 "내 말 한 마디면 군말 없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고 아마도 흡족해 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학교라는 조직의 특성(보수적이고 환경 변화에 안정적인) 때문에 제왕적 리더십이 가장 적응력 높은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기업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생선 뼈가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잔반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사소한 직언조차 하지 못하는 조직은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별 문제 없는 조직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발전을 위해 과감하게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그저 개인의 안위를 위해 목소리를 줄이고 행동반경을 개인의 직무 범위 내로 '적극적으로' 국한시키려는 조직은 상황이 비우호적으로 변하면 자연도태의 1순위가 될 것이 뻔합니다.

알아서 기는 조직일수록 위기가 발생하면 리더의 입만 쳐다보기 때문에 대응 타이밍을 놓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현장에서 재량껏 대응해도 될 걸 윗사람 지시를 받고 나서야 움직이니 말입니다. 제왕적 리더십은 '적응력 제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권한이양은 권위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조직의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생존전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권한이양은 조직 통솔의 누수가 아니라, 변화에 창의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렇다고  권한이양이 조직의 구조를 뒤바꾸는 것과 같은 장대한 사업은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풍토만 마련해주면 됩니다. 다만 리더가 먼저 관대해져야겠죠. 잔반 없는 날에 생선 뼈가 버려져도 용인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관대함이면 충분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고 아무런 불만이 없는, 가장 조용한 조직이 가장 위험한 조직입니다. 여러분의 조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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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Favicon of http://yeogangyeoho.tistory.com BlogIcon 여강여호 2010.12.17 09:26

    아직도 학교현장에서는 이런 권위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군요....권위와 권위주의는 분명 다른 의미인데 말이죠...날이 좀 풀렸나요?...건강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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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10.12.17 15:32 신고

      학교 뿐만 아니라 기업조직에서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한 듯 합니다. ^^

  2. Favicon of http://newhanyang2020.kr BlogIcon 서진석 2010.12.18 17:14

    유 선생님. 안녕하세요. 며칠 전 티스토리 초대장을 보내주신 서진석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기초공사 마무리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늦었지만, '시나리오 플래닝'도 잘 읽었습니다.

    저는 대학 전략기획팀에서 발전전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발전전략은 2020년을 향한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정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죠. 역시 선생님의 말씀입니다만, 구성원들의 변화를 유도하려면, 예측된 수치와 그래프가 아닌 충격적이고 생생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전율을 느낍니다.

    저희도 자율과 책임을 외치고 있습니다만, 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참을 끌어내지 못하는 비전과 전략은 역시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발전전략과는 좀 다른 방향에서 '창의제안제도'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소통의 활성화를 통해 자기 업무와 자기 직장에 대한 주인정신을 불러 일으켜, 창의행정의 기반을 조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위에 올려주신 내용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자주 들러 좋은 글 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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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10.12.20 20:09 신고

      블로그를 만드셨군요. 저도 들어가 살퍄봐야겠습니다. ^^ 시나리오 플래닝이 조금 어렵지는 않았는지요? 제가 자세히 쓴다고 썼는데 오히려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지나봅니다.
      발전전략이라면 일반기업에서의 비전과 같겠군요. 비전이란 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그저 멋진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한, 벽걸이 액자용으로 전락하기도 하죠. 사람들에게 구체성을 주지 못하는 비전이 대개 그렇지요.

      한양대에는 서진석님과 같이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니 역시 한양대에 계시는 유영만 교수님과 함께 좋은 학교를 일구어내시리라 생각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