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고객 중 어떤 사람이 저에게 “학력고사에서 300점 넘으셨나요?”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하며 잠깐 멈칫하다가 있는 그대로 “공부를 못해서 못 넘었는데요.” 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는 “어, 그래요? 의외네요. 전 300점은 넘으신 줄 알았어요.” 라며 보일 듯 말 듯 조소(嘲笑) 섞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학력고사 시절에 300점은 하나의 기준이었음)

그 당시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으나, 몇 번의 술자리에서 장난스레 필자의 ‘어이없는’ 점수를 들먹거릴 때마다 한대 쥐어박고 싶은 걸 애써 참았지요. “그래, 도대체 당신은 몇 점 받았는데?” 라고 받아치니 그는 인비(人秘)라며 능글능글하게 웃었습니다. 참 개운치 않은 인사(人士)였습니다.

둘 중 무엇이 더 맛있을까요? 서열을 매겨 볼까요?


저는 인사평가 제도를 수립하거나 손질해주는 컨설팅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인사평가는 무엇을 위해 실시하는지에 관해 자괴감에 가까운 의문이 들 때가 간혹 있지요. 그 이유는 바로 누가 누구보다 낫고 점수는 몇 점이다, 라는 식으로 인사평가가 잘못 활용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사평가는 평가라는 도구를 통해 부하직원의 장점과 성과를 북돋아 주고 단점과 흠결을 보완하도록 상사가 조언해주고 이끌어주기 위한 공식적인 의사소통 채널입니다. 상사와 부하직원이 만나 지난 1년 동안의 성과를 뒤돌아보면서 잘한 점과 못한 점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앞으로 1년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는 것이 인사평가가 가진 본래의 목적이죠.

거시적으로 말하면, 인사평가를 통해 직원들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조직의 목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러한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인사평가는 반드시 ‘육성형 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업에서 시행되는 평가제도의 관점은 누가 더 점수가 높고 누가 더 낮은지를 측정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육성형 평가가 아니라, 학력고사식 사정형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는 거죠. 평가결과가 나오면, 직원들을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보다는, 전 구성원을 1등부터 꼴찌까지 어떻게 서열을 매겨야 하는지에 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역량과 시간을 집중합니다.

보통 직급 단위로 묶어서 해당 직급별로 평가서열을 매기는 작업을 하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상당부분 억지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개개인이 수행하는 업무는 서로 다릅니다. 개인별 업무와 목표에 따라 평가받는 지표도 상이합니다. 또한 평가하는 상사도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상황에서 나온 평가결과들을 한 통에 집어넣어 서열을 매기려면 그때부터 인사담당자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을 일일이 감안하여 오직 하나의 서열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죠.

동일한 역량과 성과를 보이는 사람은 동일한 서열에 위치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인사담당자는 평가서열을 매기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평가 받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제각각이므로 결코 동일한 양과 질의 역량과 성과를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평가자의 평가성향이 관대한지 아니면 가혹한지의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개개인의 업무와 평가 받는 지표부터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역량과 성과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수학 과목에서 90점 받은 사람과 B가 영어 과목에서 90점 받은 사람을 같은 등위로 본다면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지난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우리가 금, 은, 동메달을 각각 하나씩 획득하여 종합 6위에 랭크됐습니다. 하지만 종합순위 몇 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동계올림픽 종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쇼트트랙 금메달과 이름도 생소한 바이애슬론 금메달을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올림픽 종합순위는 여론이 만들어 낸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사담당자들은 어쩌면 올림픽 종합순위와 같이 별 의미 없는 서열을 만들려고 애쓰는 건 아닐까요?

1등보다 나은 2등과 3등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To be continued....내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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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Favicon of http://www.facebook.com/euikyum BlogIcon 네오요나 2010.02.24 15:02

    엊그제 인사평가를 받은 후배와 대화를 나눈 뒤라 윗 글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360도 평가라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강약,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참 좋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하 했는데...... 역시 세상은 서열과 순위로 사람을 판단하고 자만과 비판,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별로 좋지 않은 세상으로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요. 360도 평가로 좋아하는 후배가 받은 인사 평가제도 좋은 것 같네요. 서열과 순위를 정하기 위한 평가가 아니라 평가받는 이 자신을 위한 평가라면 누구나 환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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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10.02.25 11:22 신고

      네, 360도 평가가 기존 평가의 왜곡을 일정 부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죠. 헌데 인기투표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그것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평가가 다 그런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다면 지나치게 평가의 서열에 무게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댓글 감사합니다. ^^

  2. Favicon of http://pomoa.tistory.com BlogIcon 포모아 2010.02.25 03:04

    정말 무례한 일을 당하셨네요.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정말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다간 인간의 영혼과 가능성을 꺾어 버릴 수 있으니깐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최동석 경영연구소'라는 블로그에 이와 관련한 좋은 글이 많이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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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10.02.25 11:20 신고

      최동석 경영연구소...잘 알고 있습니다. 성과주의의 폐해에 대해 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신 분이시죠. 요즘은 바쁘신지 새로운 포스트가 올라오질 않더군요. 고맙습니다. ^^

  3. 고등학생 2010.03.02 21:33

    고등학생이지만..
    정말 1등보다 나은 2등,3등이
    저희 반에 있습니다.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는건 정말 신중히 해야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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