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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차를 운전하며 평소 애청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란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방송 중에 MC는 “사람을 믿지 말고 돈을 믿으라”는 말의 의미를 소개했다. 언뜻 들으면,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숭상하거나 미화하는 문장으로 들리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심오했다. 이 문장의 본뜻은 ‘그 사람이 어디에 돈을 쓰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보다는 어디에 돈을 얼마나 쓰는가가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돈도 함께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에 돈의 지출처를 통해 우리는 타인이 지금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방송에서 MC는 말했다. “무엇을 먹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말이 있듯이, 영수증을 가져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말도 가능하겠죠.”라고.

“사람을 믿지 말고 돈을 믿으라”는 말은 상대방의 말과 돈의 용처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씁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의 한 달간 지출 내역에 도서 구입이 전무하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발전’이 나와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일이다. 혹은 자기 발전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그보다 더 큰 욕망에 의해 억압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누군가의 지출 내역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나와 어울릴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인지 등을 꽤나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출 내역은 ‘프로파일링’을 위한 최고의 원천이다.

 



물론 지출 내역은 개인 정보라서 취득하기 어렵거니와 의도적으로 취득하려는 행위는 범죄에 가깝기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을 보면 어느 쪽에 돈을 많이 쓰고 적게 쓰는지 대략 판단할 수 있는데, 그보다는 ‘어디에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 하고 또 아까워 하지 않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 더 가치 있는 정보다.

살면서 주변의 지인들을 관찰해 보니 ‘아까워 하는 지출처’와 ‘아무리 써도 아까워 하지 않는 지출처’가 각자 다르다는 점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그런 차이는 사람들의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지인 A는 의류 구입에는 한번에 수십만원의 지출을 당연시하면서도 내 책을 쓱 한번 보더니 “2만원이나 하다니! 너무 비싼 거 아냐?”라고 진심으로 걱정(?)해 준 적이 있다(내가 아는 한, A는 결국 내 책을 사지 않았다). 지인 B는 1인분에 1만원이 넘어가는 식당에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도 술값 몇 십만원 지출에는 “좋은 술은 원래 비싼 법이지. 싸고 좋은 건 없어.”라며 합리화한다. 

지인 C는 1년에 수차례 해외여행을 즐기면서도(코로나 19 이전에) 자동차는 무조건 중고로만 구입한다. 차는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게 그의 신조다. 지인 D는 자동차 튜닝에는 수백만원의 지출을 당연시하지만 1시간에 3천원 하는 주차비가 아깝다고 주택가 골목에 아무렇게나 세웠다가 딱지를 떼이곤 한다. 

지출을 아까워 하지 않는 ‘종목’이라 해도 ‘세부 종목’에 대해서는 돈을 낼 때 손을 벌벌 떠는 지인 E도 있다. 그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오디오 기기는 굶는 한이 있더라도 구입하지만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의 월 구독료 5% 인상(500원 상당)에는 분노를 금치 못하며 몇 백원이라도 싼곳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켠다. 지출 취향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름은 없다. DNA가 다르듯, 아까운 돈과 그렇지 않은 돈 역시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그래도 나는 A가 좀 얄밉긴 하다).

‘돈 쓰기 아까워 하는 종목’과 ‘전혀 돈이 아깝지 않은 종목’이 사람들마다 다르기에 이는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부 중 아내는 여행을 가면 좋은 잠자리를 중요시하여 고급 호텔 예약을 주장하지만 남편은 “어차피 낮에는 관광을 다닐 거고 밤에는 쓰러져 잘 텐데 아무데서나 자면 어때?”라고 맞받아쳤다가 여행이고 뭐고 3박 4일 간의 부부싸움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가? 그냥 얌전히 받아 마실 것이지 한 병에 수십만원인 본인 소장의 와인을 한 잔 따라주는 친구에게 “너는 왜 마시면 없어지는 와인에 그렇게 돈을 쓰니? 그 돈 모아서 전세집이라도 마련해야지!”라고 꼰대짓을 했다가 우정에 금이 가는 사건이(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제법 많다. 

 



상대방이 내 돈을 가져다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 쓸 기회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며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행위에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남이 어디에다 돈을 쓰든 무슨 상관인가? (물론 부부 같은 경제공동체는 충분히 상관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아, 이 사람은 여기에 돈 쓰는 걸 아까워 하는구나.’ 혹은 ‘여기엔 팍팍 돈을 쓰네?’라고 생각하고 적절하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조절하거나, 필요에 따라 적당한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아주 자연스레 손절하면 그만이다. 식도락을 중시하는 커플이 그렇지 않은 커플과 함께 해외여행을 갔는데, 상대 커플이 ‘한식’을 고집하는 바람에 현지음식은 입에 대본 적이 거의 없다면 다음부터는 여행을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지 않으면 된다. ’돈을 믿으라’는 말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일러주는 지출 내역을 통해 인간관계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라는, 그리고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업 역시 돈이 어디에서 쓰이는지를 통해 그 조직이 어떤 부문을 중요시하고 무슨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테마에 관심을 가지는지 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회계가 상세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이라면 누구나 손익계산서의 비용 내역을 살펴볼 수 있으니 개인의 지출 내역을 파악하는 일보다는 용이하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이 조직(혹은 CEO)이 특별히 돈 쓰기를 아까워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부분이 구성원들의 바람에 해당하는 것인지, 구성원의 요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말은 하지만 그에 쓰이는 비용은 그저그런 수준은 아닌지 등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경영층과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오해가 무엇인지, 이 회사 조직문화의 특징과 개선 방향은 무엇인지, 바람직한 조직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비용 구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등 미래지향적인 고민도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CEO의 경영방침이 제안하는 바람직한 비용 지출 구조와 실제의 비용 지출 구조와 부합되지 않음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조직 상하간에 의사소통이 단절돼 있거나  전달 과정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일 것이다. 

 

이처럼 조직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를 통해 여러 가지 가설을 수립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개선의 포인트를 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회계전문가 혹은 관련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조직의 구성원이거나 투자자라면 누구나 재무제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기업을 믿지 말고 돈을 믿어라. 홍보 기사나 내부 구성원들의 말보다 비용 지출 내역이 기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법이다.   (끝)

 

*이 글은 제가 쓴 책 <일이 끊겨서 글을 씁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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