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의 권한위임이 바보 같았던 이유   

2020. 3.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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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왕가의 두 번째 왕인 영국의 찰스 1세는 절대군주제에서 통할 왕권신수 사상을 주장하며 재위 기간 내내 의회와 정치적으로 반목하며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만 의회를 여는 행태를 여러 번 보였다. 일례로 1640년에 4월에 스코틀랜드 전쟁 비용을 승인 받을 목적으로 11년 만에 처음 의회를 열었지만, 찰스 1세는 의회가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자 1개월만에 다시 해산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찰스 1세와 의회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던 영국은 급기야 1642년에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인 '영국 내전'의 혼란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의회파가 수도 런던을 장악하자 인근의 옥스포드로 피신한 찰스 1세는 의회파와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앞둔 상황에서 전투 지휘관들에게 군대의 전권을 위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항상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군사 전략을 입안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던 찰스 1세로서는 어쩌면 꽤나 자연스럽고 어쩌면 자기방어적인 발상이었다.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고 평소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며 햇빛을 싫어할 정도로 은둔하기를 즐기는 등 이런저런 컴플렉스가 많았던 그는 자신이 앞장서 군대를 지휘해야 한다는 걸 매우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을까? 그런 부담을 떨치기 위해 권한위임이라는, 당시로서는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발상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유야 어쨌든 지휘관들에게 군대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은 요즘의 시각에서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이고 그의 말처럼 창의적인 전략 실행을 가능케 하는 선진적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권한이양 내지는 권한위임은 현대의 조직에서 무척 강조되는 리더의 덕목 중 하나로 여겨지니 말이다.

 

찰스 1세



하지만 찰스 1세가 단행한 권한위임은 커다란 맹점을 지니고 있었다.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진행하는 이세환 기자의 말에 따르면, 주로 지방 귀족들로 구성된 왕당파 지휘관들의 전투 지휘 능력이 보잘것없었다고 한다. 막강한 영국 해군과 달리 당시의 육군은 국왕이 비상시에 동원 가능한 군대가 고작 몇 십 명 수준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상비군의 병력 규모도 얼마 되지 않았고 훈련 수준도 매우 낮아 오합지졸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훈련은 한달에 한번 할까 말까였다. 여기저기에서 모인 민병대 수준의 군대는 통일된 지휘 체계에 정렬되지 못했고 사실 왜 싸워야 하는지 그 목표의식도 강하지 못했다. 지휘관들의 머리 속에는 의회파 군대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관한 전략 따위는 없었고 일단 붙어서 한번에 끝내면 된다는 막연한 낙관론이 지배했다(이것은 의회파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능하고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지휘관들에게 권한위임을 하면, 게다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리더가 과감하게 권한위임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찰스 1세는 똑똑히 보여주었다. 찰스 1세는 부하들이 창의적인 발상으로 전략을 수립할 거라 기대했지만, 무능한 왕당파 지휘관들은 복지부동을 최선의 전략으로 선택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그들은 찰스 1세의 권한위임을 고맙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핑계를 대며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의회파 군대가 지근거리에서 지나가도 일부러 못 본 척 하기 일쑤였고, 어쩌다 실수로(?) 맞닥뜨렸을 때도 전열을 정비하고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줄 몰라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경험과 능력 없던 의회파 군대도 역시 그랬다).

이렇게 왕당파든 의회파든 오합지졸들의 싸움으로 시작된 영국 내전은 금방 끝날 줄 알았으나 무려 7년이나 지속되며 90만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찰스 1세가 의회파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 1649년에 끝이 난다(공식적으로는 1651년에 종료).

권한위임과 권한이양은 기업 조직에서 바람직한 조치로 흔히 언급된다. 현장에서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구성원의 동기와 자율성을 부여하며, 실질적 업무능력을 제고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리더십의 자연스러운 승계를 가능케 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한위임의 효과가 빛을 발하려면 찰스 1세가 몸소(?) 증명했듯이, 지식 연마, 경험 축적, 철저한 규율 등을 통해 구성원의 기본적 역량이 어느 정도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권한위임의 기대효과 중 하나가 구성원의 역량 향상이긴 하지만, 그것은 기본역량이 충족된 상태에서 그보다 더 '고급진' 수준으로 향상시키고자 할 때만 발휘되는 효과다. 초보적 지식과 경험만 있는 자에게 권한위임을 한다고 해서 전문가적 역량을 기대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또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역량을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의지가 높아야 한다는 것도 권한위임의 또 한 가지 전제조건이다. 왕당파 군대의 지휘관들은 '왕이 위험하니 도와주자'라는 목적만 있을 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목표의식은 거의 없이 내전에 그저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직문화를 혁신한다는 차원에서 권한위임(혹은 권한이양)을 추구한다면, 먼저 구성원들을 철저하고 치밀하게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1~2년에 끝날 일은 절대 아니다. 100퍼센트까지는 아니지만 하위 역할의 구성원이 상위 역할을 거의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된 상태, 부재 시에 대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완성된 상태까지 이르도록 훈련시키려면 장기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지속적으로 좋은 인재를 채용하고 직급과 상관없이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구성원들을 발굴해 가야 한다. 이런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권한위임은 오히려 조직문화의 와해와 조직의 붕괴를 앞당기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경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임원(executive)'을 'CEO로부터 의사결정권과 조직관리를 이양 받은 자'로 정의한다. 임원은 CEO를 대신하고 CEO를 대변하는 사람, 즉 ‘작은 CEO’라고 말할 수 있다. 우스운 비유일지 모르지만 "신이 자신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곳에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이 있듯이 CEO가 자신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임원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성과가 좋다고 해서 보상 차원으로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무척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임원이 자신을 그저 '자기네 사업부(혹은 부문)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만 여겨서도 안 된다. 임원은 유사시 CEO를 대신할 '작은 CEO'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담당 조직의 이익보다 회사 전체의 사업 기준에서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임원 한 명을 내외부적으로 뽑을 때 CEO는 쉽사리 결정해서는 안 된다. 찰스 1세의 패착은 여기저기에서 의용군 수준으로 모인 지휘관들에게 그 막중한 권한을 '마구'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안 나서면 돼"라는 자기방어적 심리가 팽배해지고 말았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그 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나 해당된다. 윗사람을 대신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지닌 자, 그리고 더 높은 수준으로 능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더 큰 권한을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찰스 1세는 사람 보는 눈을 키우든지, 아니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의회파에 대적할 만한 자기 세력을 철저히 육성하든지 했어야 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가?

 


*참고 사이트
국방TV 유튜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150부 영국내전 II
https://youtu.be/MEvm9Wef1Jk

 

네이버 지식백과 '영국 내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4930&cid=59016&categoryId=5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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