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5월 15일 '스승의 날'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면 제 마음 속에 한 분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부끄럽지만 까까머리 중학교 때 만난 그분과의 추억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오월이다. 저녁 무렵, 노란 유채꽃밭을 지나 언덕을 오른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서풍이 가슴 위로 쌓이다 흩어진다.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 위, 나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선다. 이미 지평선을 넘어간 해가 진홍빛 숨을 힘겨이 토해 올릴 때 반대편 동녁 하늘로 손톱 같은 상현달이 떠오른다. 오늘도 저 달은 별 하나를 귀고리처럼 달았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온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의 시다. 외우는 데 젬병인 내가 이 시를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는 까닭은 이 시에 가락을 입힌 '별'이란 노래 때문이다. 말로만 두발 자율화 시대, 머리를 박박 깎은 중학교 2학년생의 나는 학교의 합창단원이었다. 특별히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한 학년이 세 반 밖에 안 되는 시골 중학교에서 음치만 아니라면 누구나 30명 짜리 합창단에 낄 수 있었으니까. 도내 합창단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후에 음악실에 남아 지겹도록 부른 노래 중 하나가 이 노래, '별'이었다.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진 탓에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시골 외갓집에 겨우 의탁하게 된 나는 세상의 끝에 버림 받은 느낌이었다. 그랬다. 사춘기 소년의 눈에는 똑바로 보이는 물체가 없는 법. 지위의 추락이랄까? 한때 시골 아이들에게 방학이면 외갓집에 놀러오는 세련되고 깔끔한 서울 아이이던 나는 이제 맡겨진 아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외갓집은 그저 잠자는 곳일 뿐. 나는 가능한 한 학교에 오래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저녁 때까지 계속되던 합창 연습은 내겐 훌륭한 핑계거리였다. 합창단원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것 말고도 합창단원이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80년대 초, 어두운 흑백 이미지로 깔리는 시골 중학교의 배경 위로 파스텔톤의 청록색 머리핀이 떠오른다. 음악선생님의 까만 머리칼 위에 언제나 얹어져 있던 청록색 머리핀. 운동회 때 입는 트레이닝복조차 청록색일 정도로 선생님은 그 색깔을 좋아했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청록색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그 시절의 선생님 나이 정도의 숙녀를 발견하면 어느새 나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키 작은 아이가 된다. 부끄럽지만, 내게 청록색은 풋사랑의 흔적으로 서툴게 각인되어 있다.
마음 둘 곳 없던 내게 선생님은 엄마이자 친구였고 마음대로 혼자만의 연인이었다. 잘하지 못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선생님은 귀여워 했다. 학교 비품인 악기 몇 가지를 본인의 재량으로 무기한 대여해주기도 했다.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선생님을 기쁘게 할 생각으로 16마디 짜리 노래를 작곡하느라 몇날 몇일을 멜로디언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한번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살짝 표절하여 선생님과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원고지 50매 짜리 짧은 소설을 써본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유치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조난 당한 선생님을 구하고 대신 바위에서 떨어져 죽는다. 비현실적인 에코가 들어간 목소리로 '선생님'을 서너 번 외치면서. 선생님은 내 연정을 끝내 몰랐으리라. 악보와 원고지는 진작에 불쏘시개 신세가 되었으니까.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만 싶었을지도 모른다.
두 달여의 연습 후, 드디어 합창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죄다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으로만 구성된 합창단은 우리가 유일했다. 여학생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깔보는 눈치였다. 우리 팀 덕에 꼴찌를 면하게 됐다는 안도의 눈빛이 그녀들에게서 느껴졌다. 남자들은 노래도 못하고 음악도 못한다는 게 당시 중학생들의 인식 수준이었으니까.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남학생들의 무게감 있는 음이 대회장 구석구석에 퍼질 때, 함께 준비한 야심곡 '꽃 사세요'가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 그리고 우리 팀이 결국 1등으로 호명될 때 그녀들의 얼굴에서 떠오르던 야릇한 표정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기뻤지만 여러모로 슬픈 날이기도 했다. 대회를 끝으로 합창단은 해체가 예고되어 있었다. 집에 늦게 들어갈 핑계도, 선생님을 자주 만날 기회도 사라질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후도 오랫동안 생인손처럼 남을 터였다. 선생님은 합창단원들에게 흰 티셔츠에 청바지로 복장을 통일하라고 말씀하셨다. 고민이었다. 외갓집 사정상 청바지를 사줄 여유가 없었고 그런 부탁을 입 밖으로 꺼낼 나도 아니었다. 결국 청바지와 가장 색깔이 비슷한 짙은 회색 면바지를 입을 수밖에. 게다가 그 바지는 외삼촌 것이라 몇번이고 밑단을 접어야 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내 바지를 가리키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생이 스무살 청년의 옷을 빌려 입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선생님의 눈에서 날카로운 책망이 느껴졌다. 대개 궁핍한 시골 아이들인지라 선생님이 나에게만 복장 문제를 지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송곳처럼 내 마음을 오래 후볐다. 세상의 끝에서 손 잡아주던 선생님이 먼저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미웠다. 그리고 서러웠다. 온통 청록생이던 세상은 남루한 빛의 너절한 환상으로 남았다. 연정은 끝내 연민이 되었다.
합창대회 후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성질이 무섭기로 소문난 체육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 눈에도 그 둘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어쩐지 둘이 다정하다고 아이들이 서로 끼득거리던 터였고 음악실에서 둘이 풍금을 연주하던 광경을 나도 목격했더랬다. 같은 학교에 부부가 함께 근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마 후 도시의 중학교로 전근 갔다. 4개월 뒤 나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전학하면서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툭! 그리고 꽤 오랫동안 시골 시절을 잊으려 애썼다.
10년 후, 일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온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절 그 중학교를 찾았을까? 검은색 이승복 어린이 동상과 책읽는 여자아이의 하얀 동상은 예전 그대로였다. 기억에 비해 학교의 축척이 조금 작아졌을 뿐이었다. 1층에서 올려다 뵈는 2층의 음악실에서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란 노랫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청록색 머리핀을 꽂은 선생님이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세고 있을까? 연신 팔을 흔들며 테너의 음을 침범하는 어중간한 바리톤 파트를 채근하고 있을까? 건반 위에 올려진 기다란 손가락은 오늘도 ‘소녀의 기도’를 연주하고 있을까? 아마 나는 병영생활의 고단함을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던 추억으로 위안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빛바랜 추억을 뒤집어 보며 누구에게도 배려 받지 못했던 내 사춘기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울리지 않은 바지를 가리키던 선생님에게 뒤늦게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때늦은 방문은 툭 끊어진 끈을 이어줄 리 없었다. 기억의 스크린에서 가물대는 선생님은 아무말 없었고, 겨울방학을 맞아 인적 없는 학교는 추위가 더욱 사무쳤다. 흥미를 잃은 나는 터무니없게도 30분도 안 되어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20년이 다시 흘렀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해마다 5월 15일이면 스승으로서의 스승이 아니라, 엄마이자 친구이며 혼자만의 연인이기도 했던 음악선생님을 떠올린다. 불경일까? 세상으로부터 방기된 사춘기 소년에게 더 이상 끄트머리로 밀려나지 않도록 괴임목이 되어 준 선생님. 나에겐 그 이상의 스승은 없다. 감사한다는 판에 박힌 답례로는 부족하다. 후회된다.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해 드리지 못한 것과 전근 가는 선생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용서를 구한다. 30년이 지나도록 툭 끊긴 끈을 방치한 채 찾아뵙지 않는 죄를.
이 시간의 하늘빛이 좋다. 암청색 하늘이 검붉은 노을과 만나는 경계선에서 여러 색깔의 빛들이 뛰논다. 서늘한 바람결에 아주 잠깐 청록빛이 비쳤다 사라진다. 소년의 마음에 잠시 얹어졌다 사라진 청록색 머리핀처럼. 시간은 흘러 추억으로 멍울진다. 멍울진 추억은 또 어디로 쌓일까? 지금, 1밀리씩 어둠이 내린다. 별이 더욱 빛난다.
(* 이 글은 한국후지제록스의 기업 블로그인 '색콤달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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