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말하고도 답을 모르는 이유   

2011. 1.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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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에 잠깐 TV에서 '꽃다발'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게 됐습니다.  처음 봐서 모르겠지만 여러 출연자가 게임을 하면서 퀴즈를 맞히는 프로그램인 듯 했습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보던 중에 하나의 장면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사회자(개그맨 정형돈)가 이런 문제를 냈습니다. "우울증 치료에 탁월하고, 폐암 환자의 5년 후 생존확률을 2배나 높여주는 것으로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출연자들이 문제를 듣자마자 서로 자기가 답을 말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더군요. 저도 답이 무엇일까, 궁금했답니다. '대체 하늘이 내린 선물이 뭘까?'



사회자는 가수 유채영에게 답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유채영은 특유의 목소리로 "음...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면 바로.... 하늘의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자란...... 파?"라고 대답하더군요. 사회자는 대답을 듣자마자 '땡!'을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아, 바로 답 근처까지 왔는데...."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졌습니다. 유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내가 뭐라고 말했지?"라며 방금 전에 자기가 한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답답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늘의 햇빛을 받고 자란.....파"라고 말했음을 기억해 내고도 정답을 대답하지 못하더군요.

사회자가 "유채영 씨가 이미 답을 말했다"라고 다른 출연자들에게 힌트를 주니까 "파가 아니라 양파!", "파가 아니니까 마?"라는 대답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사회자는 "유채영 씨가 답을 수 차례 이야기했다구요!"라고 배를 부여잡으며 웃더군요. 출연자들이 왜 답을 말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이때 저는 답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다른 출연자들이 오답의 바다를 표류하는 동안, 유채영은 결정적 발언을 한 자격(?)으로 문제를 맞힐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가졌지만 답을 맞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떤 여자 출연자가 "햇빛!"이라고 정답을 말하고 나서야 유채영은 정답을 말해 놓고도 답을 맞히지 못한 것이 어이가 없었던지 쓰러질듯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사회자들은 그렇게 말해줬는데도 못 맞힐 수 있냐며 유채영을 비롯한 출연자들을 장난스레 꾸짖으면서 다음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이런 장면은 '사고의 프레임(Frame)'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채영이 "하늘의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파"라고 말하는 순간, 하늘이 내린 선물은 바로 음식이라는 '프레임'을 출연자와 TV를 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빛의 속도로 설치했습니다. 물론 유채영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람들에게 형성된 사고의 프레임은 아주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파가 아니라 양파", "그렇다면 마?"라는 식으로 밭에서 자란 채소류 이외의 답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던 겁니다. "햇빛"이라는 단어를 말해놓고도 그게 답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여러분이 이미 정답을 알고 느긋하게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이라면(혹은 사회자의 입장이라면), 정답을 다 말해놓고도 못 맞히는 상황이 우스꽝스럽고 출연자들이 바보스럽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낫을 보고도 기역자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프레임에 한번 '갇히게' 되면, 프레임에 갇혔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사고를 제약하고 맙니다. 프레임 안에서 여러분의 사고는 프레임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위와 같은 퀴즈나 게임에서는 사고의 프레임을 깨뜨리기가 비교적 용이합니다. 아주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머리 속에 사고의 '감옥'을 설치하는 놀라운 속도를 보이지만, 그만큼 깨지기도 쉽습니다. 창의적 사고를 주제로 한 워크숍이나 강의에서 사고의 틀을 깨야만 풀 수 있는 퍼즐을 본 적이 있다면(그리고 퍼즐 풀기에 어느 정도 연습이 되었다면) 퍼즐이 형성한 프레임 쯤이야 간단하게 없앨 수 있겠죠.

한번 형성되면 웬만한 공격에도 깨지지 않는 사고의 프레임들은 '느리지만 집요하고 체계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통 '이론(理論)'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어떤 이론이 시대의 주류가 될 때,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죠. 이론들은 서로 경쟁하고 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신자유주의와 그것과 대척점에 서있는 케인스주의 등이 그렇죠.

이런 이론들은 오랜 학습과 연구와 같이 '느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머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철옹성 같은 프레임을 형성하고 마침내 자신의 숙주인 인간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그러고는 이론의 틀로만 현상을 이해하게 하고, 이론과 반대되는 현상들을 예외일 뿐이라 배척케 합니다.

게다가 프레임은 이론과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비록 이론이 현상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해도, 이론을 훼손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론이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할 때, 혹은 이론이 다른 차원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이상(理想)'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2010년의 마지막 날,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계발 전문가로 이름이 자자한 모 씨의 트윗 때문이었죠. 여기서 그의 트윗을 인용하지는 않겠으나 진보진영이 추진하는 '무상급식'을 맹렬히 비난하는 투의 트윗이었습니다. 그걸 두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비난하는 사람들이 제 타임라인에는 더 많았지만)들의 트윗과 RT가 세밑의 트위터를 달궜습니다.

그는 자신의 트윗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짐짓 당황했는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의 트윗을 추가로 올리더군요. 맞습니다. 그에겐 분명히 '무상급식은 나쁘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권리는 그에게는 없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존중 받으려면 자신의 주장에 대한 타인의 반박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가 그토록 비판 받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그가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사고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급식에 상당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를 위협하는 '빈자(貧者)'들의 아우성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가 한 달이 멀다 하고 내놓는 책에서 꾸준히 주장하는 생각도 그러하죠. 자신이 신봉하는 이론의 틀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교조주의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한 이유입니다.

어렵게 배웠고 수십 년간 외쳐온 이론이 잘못됐다고 순순히 인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고의 프레임이 자신의 숙주인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결점을 숨길 뿐만 아니라, 설령 현상을 틀리게 설명하고 반영하는 오류를 나타났다 해도 어떻게든 '삐져나온' 옷자락을 이론의 구멍 안에 쑤셔 넣게 만듭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쌓은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리란 공포심도 완고한 고집에 한몫합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진정한 자기계발 전문가라면 바로 자신이 사고의 프레임을 깨고 새로운 시각에 눈떠야 하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와 반대되고 신자유주의를 훼손한다 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예외로 치부하는 일은 변화하지 않으려는 '관성'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론을 천착하다 못해 그것을 범접치 못할 이상(理想)으로 떠받들며 신성(神性)을 수호하는 행위는 '항상 깨어있으라'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아닐까요?

이론이 만든 프레임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론이 있어야 현상을 설명할 수 있고 뭔가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고의 프레임은 맹목이란 부작용도 함께 선물합니다. "하늘의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파"라고 말해 놓고 "햇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론을 앞세우고 현실은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 일은 '꽃다발'의 출연자들이 밭에서 자란 채소류에서만 답을 찾으려는 것과 같죠. 곰팡내 나는 이론의 책갈피에 갇힌 그의 모습이 안쓰러운 이유입니다.

사고의 프레임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나를 지배하는 프레임이 무엇인가'라고 자문할 때 철옹성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열린 사고(open-mind)의 시작이고 바로 옆에 있는 답을 찾아내는 동력이겠죠. 그러나 이런 자문조차 부단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항상 깨어 있으려면 말입니다.

'열린' 월요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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