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헤드폰과 이어폰으로 음악을 즐겨 듣기에 그와 관련한 인터넷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해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쓴 글에서 좋은 정보를 얻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활동 중이죠. 그래서 그곳 회원들에게 저는 약간 ‘네임드’ 회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금주의 인기멤버로 서너 번 선정되기도 했고요.
최신 음향기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긴 하지만, 워크맨이나 스피커, 앰프처럼 제가 가진 몇 안 되는 빈티지 음향 기기를 자랑삼아(“전 이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올리곤 합니다. 달리는 댓글 대부분은 ‘예쁘다, 멋있다’는 반응이지만, 가끔 신경을 거슬리는 댓글이 올라옵니다. 댓글을 단 사람은 악의없이 장난으로 올렸겠지만 그 내용은 묘하게 제 기분을 뒤틀어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것을 좋아하시니(가지고 계시니) 연식이 딱 보이는 걸요?”와 같은 댓글입니다. 풀어 말하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니 나이가 많이 먹었겠다.”라는 뜻입니다. 글에서 제가 어렸을 때 사용했던 기기라고 소개했으니 계산해 보면 제가 몇살인지 바로 유추할 수 있었겠죠.
저는 이런 댓글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 ‘댓글쓴이의 의도가 뭘까? 연식이 오래되면(나이가 많으면) 안 되는 걸까? 여기 회원들은 죄다 30대 이하 뿐인가? 자기네들 노는 곳에 왠 노땅이 설치냐는 뜻일까?’ 카페 운영자의 말에 따르면, 회원의 연령 분포는 (주로 남자이긴 하지만) 10대부터 60대까지 퍼져 있습니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관심이 적은 영역이고 일반 전자기기보다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평가 받는 헤드폰과 이어폰을 구매할 능력을 감안한다면 카페에는 20~30대뿐만 아니라 40~50대의 회원도 충분히 ‘존재’한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겠죠. 그런데 왜 굳이 ‘연식’ 운운하는 댓글을 ‘굳이’ 다는 걸까요? 나이들었다는 것 자체가 지적해도 될 만한 약점인가요? 조금은 짜증이 나서 한번은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이죠?”라는 대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상대방은 침묵…).
나이듦이 왠만하면 남들에게 감춰야 할 부끄러움인가요?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서도 “이 노래가 좋다. 아, 이런 말 하면 내 연식이 드러나려나?”라며 ‘아차!’하는 듯 언급하는 글을 제법 자주 봅니다. 저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할까?’ 글쓴이가 별뜻 없이 내뱉거나 쓰는 이런 류의 말 속에 ‘나이드는 것은 부끄럽고 감춰야 하는 일이야’라는 편견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저는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20대 시절에 40~50대 부장님들이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젊은 시절을 함께 한 노래니까 아직도 좋아하나 보군’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뭐야, 저 촌스럽고 오글거리는 음악은!’이라고 조롱했었지요. 이제 제가 그들의 나이가 되어 20~30대 친구들에게 ‘연식 딱 나오네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제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나이 먹은 게 부끄러움이 아니듯 나이 젊은 게 자랑은 아니니까요. 곰곰이 따져 생각하면, 연식 운운하는 소리는 인종 차별이나 남녀 차별적 발언과 진배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흑인이군요?”라고 댓글 달 수 있겠습니까?
하도 연식 운운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으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속으로 ‘그래, 너는 젊어서 좋겠다. 얼마든지 내 연식을 지적해 주렴’이라고 튕겨 내버리죠. 그러고는 ‘하지만 난 나이들어 좋은 걸!’이라고 뒤따라 내뱉습니다(물론 속으로). 정말입니다. 나이들어서 아주 좋다는 걸 오늘 느꼈거든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못사게 했거나 돈이 없어서 못샀던, 소위 키덜트용 장난감 하나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외쳤습니다. “나이들어서 좋구나. 내맘대로 이런 걸 살 수 있으니까!”
누구나 평균 수명을 산다면 인생 전체에서 얻는 경험의 양이나 질은 비슷비슷합니다. 누가 조금 더 일찍 세상에 나와 경험을 축적하기 시작했냐의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나중에 나온 자가 먼저 나온 자를 보며 ‘당신의 경험은 구리다’라고 말할 이유도, 권리도 없죠. 더욱이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니까요. 코미디언 지상렬이 연식 운운하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넌 늙어봤냐? 난 젊어봤다!” 참, 시원한 일성입니다. 사람의 존귀한 삶에 전자제품이나 자동차에나 붙일 ‘연식’이라는 단어, 이제는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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