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인 듯 보이는 어느 공익광고의 문제점   

2017. 7. 3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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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이 광고 봤어요?”

H군은 날 보자마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게 들이대며 이렇게 물었다.

“무슨 광고인데요?”

“일종의 공익광고인데요, 상담원들의 통화연결음을 가족들이 육성으로 만들었더니 고객들의 폭언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에요.”

“음… 그렇다면, 좋은 광고 아닌가요? 아이디어도 좋은 것 같구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난 표정이에요?”

H군은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일단 그 광고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말해 봐요.”

또 나를 시험하려는구나.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하면 어쩌지. 아무튼 2분 51초에 이르는 그 긴 광고를 보고 나서 말해야겠다 싶었다.


(광고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H군의 말마따나 상담원들이 평소 겪는 고객들의 폭언과 욕설을 줄이기 위한 ‘작은’ 방법으로 상담원들의 자식, 남편, 부모가 통화연결음, 아니 통화연결 멘트를 녹음하여 들려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담원의 아이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 드릴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멘트를 상담원과 연결되기 전에 들려주는 식이다. 상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자 부모이자 ‘아내’라는 점을 고객에게 인지시켜서 상담원을 하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대상으로 상대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아이디어였다. 


뭐가 문제지? 나는 한번 보고 H군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번 더 광고를 보면서 어떤 측면이 H군을 화나게 했는지 ‘분석’해 봤다. 일단 광고에 나오는 상담원은 모두 여성이었다. 현실적으로 콜센터에 근무하는 직원의 대부분이 여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상담원이 없는 것은 아니니, 광고에 등장하는 여러 상담원들 중에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남성 상담원이 나왔어야 현실을 반영한 균형 있는 시각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고 “나오는 상담원이 모두 여성이라서 그게 언짢은 건가요? ‘상담원 = 여성’이라는 공식과 비뚤어진 젠더 의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라고 H군에게 물었다.


“그것도 이 광고의 문제이긴 하지만, 더 심각한 게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미안하지만 등장하는 상담원들이 모두 여성인 것 빼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는데요. 상담원의 아이, 남편, 부모가 통화연결 멘트를 하게 해서 그만큼 고객의 폭언이 줄어들었다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참신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곳에 꽃을 심어서 더 이상 무단투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이끌어낸 좋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구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H군의 표정을 살폈다. H군은 한숨을 쉬더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자기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보라고 손짓했다. 여기에 H군의 글을 옮겨 적어본다.


———

이 광고... 매우 거슬린다.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없다면 ... 저 통화연결 녹음은 누가 해줄까? 자기 아내가 ,부모가 , 자식이 맨날 전화로 욕이나 쳐먹고 있는데, 조직에선 아무 대책도 안 세우고 안내원들만 사지에 몰아넣고 그냥 몸빵만 치라고 일시키는데 그저 우리 딸, 우리 아내 , 우리부모 험한꼴 덜 당하라고 저런 통화음을 속좋게 녹음 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 나 역시 고객센터에서 근무했었다. 회사는 전국 수십 개 매장을 갖고 있던 외국계 외식업체였지만 고객센터 컴플레인 전화와 메일 , 게시판관리는 딸랑 나 혼자였다. 온갖 진상 전화 받아가며 스트레스 받다가 결국 한쪽 귀에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도 고생이다. 욕은 일상이고 심지어 고객이 회사까지 쳐들어와 물건을 부수고 내게 폭력을 써도 어느 누구도 아니, 고객의 불만 원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사는 어떤 사후조치도 개선안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부서 여직원은 내게 '언니도 빨리 시집 가서 이런 일은 다시 하지 마’라는 현명한 조언도 들었다. 난 그 때 무능한 팀장과 무책임한 회사에 대해 분노했고 그들과 싸웠지만 결국 퇴사하고 말았다. 


이미 15여 년이 지났지만 이 분야는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그저 감정노동자라는 해괴한 이름만 생겼다. 조직과 시스템이 직원을 보호해야 하는데 왜 가족이 나서서 쉴드쳐 줘야하는가? 고객은 그냥 진상부리는 개, 돼지, 레밍이냐?  문제 핵심은 교묘히 피해가고 미담만 만드는 이런 캠페인. 심히 탁하다 탁해.

———




“이제 진짜 문제가 뭔지 알겠어요?”

내가 글을 다 읽고 나자 H군은 이렇게 말하며 “무엇이 이 광고의 문제인지 한번 말해봐요.”라고 나에게 다시 시험문제를 냈다.

“H군 말한대로, 고객 불만의 책임은 회사측에 있는데, 상담원들의 가족이 동원돼서 해결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이군요. 상담원들이 욕받이가 돼서 고객의 폭언과 욕설을 막아냈는데 이제는 그런 의무를 가족에게까지 은연 중에 떠넘기는 것 같아요. 가족들이 저렇게 멘트를 남겨도 폭언하고 욕하는 고객이 반드시 있을 거에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그렇게 멘트를 녹음했는데도 그런 일이 생기는구나’라며 그때부터는 가족들도 책임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상처를 받지 않을까요?”


고객 불만의 책임이 회사측에 있다는 점을 아는 조직이라면, 그리고 직원들을 '진짜로' 아낀다면 직원들의 가족들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조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즉 CEO가 직접 멘트를 녹음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이 있는 상담원들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의 녹음을, 가족이 없는 상담원들은 CEO의 멘트를 내보냈으면(혹은 가족 유무와 상관없이 CEO의 멘트가 랜덤으로 나가도록 했으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CEO는 뒷전에 앉아 이런 ‘미담’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고객 폭언의 문제가 결국 자신의 책임임을 안다면 자신도 팔을 걷어 붙이고 통화연결 멘트를 녹음했어야 옳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회사의 사장 아무개입니다. 제가 아끼는 직원이 곧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고객님의 요청을 잘 처리해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만약 지나친 폭언과 욕설을 하실 경우에는 저희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라는 식의 경고 메시지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광고의 문제점은 '고객 폭언은 너희들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봐' 라는 생각이 전제된 것 같기 때문이다.




H군에게 나의 아이디어를 말하니, 정말 그래야 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직원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직원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있다면 설령 고객이라 하더라도 엄중하게 상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상담원들을 욕받이로 내보내고 뒷전에서 미담만을 즐기는, 비겁한 ‘장수’가 되지 않는 길이다.


댓글이 많이 달린 걸 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공익광고에 감동했고 아이디어의 ‘천재성(?)’에 탄복한 듯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런 미담성 광고에는 우리가 지금껏 지니고 있는 선입견, 편견, 편향, 고루하고 잘못된 가치관(특히 빈약하고 비뚤어진 젠더 의식)이 투영되고 녹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담원은 모두 여성이라는 편견, 가족 없는 상담원이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한 배려 없음, CEO는 뒷짐 지고 빠져 있어도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계급의식 등이 바로 그러하다. 


앞으로 이런 미담류 광고는 철저하게 뜯어볼 일이다. H군의 시험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H군이 상담원이라면 누가 멘트를 녹음해줄까? 고양이들이 해주려나? “야옹, 야옹, 야오옹~~~”하면서.



(*덧붙이는 글)

이 공익광고의 아이디어는 아마도 어느 까페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입는 옷 뒤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적힌 글귀에서 힌트를 얻은 듯 하다(추정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탁월하다. 하지만 CEO나 고위 임원을 멘트 녹음에 동참시켰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라는 점은 이해된다.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음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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