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면접 보지 마라   

2012. 8. 31. 10:19
반응형


'빨간 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듭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빨간 동그라미(혹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그려진 사선)로 채점한 시험지의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우리에게 빨간 색은 무언가를 수정하거나 바로잡고 측정하거나 처벌을 가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반면 파란색이나 녹색은 시험 채점이나 측정이라는 이미지와 바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이 작성한 글이나 보고서를 평가하고자 할 때 그가 빨간 펜을 쥐고 있다면 여러분은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색깔의 펜을 사용할 때보다 더 가혹하게 평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에이브러험 러트치크(Abraham M. Rutchick)와 동료들은 간단한 몇몇 실험을 통해 빨간 펜에 노출되면 오류를 더 많이 찾아내고 평가가 박해진다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1)


러트치크는 참가자들에게 철자 몇 개를 지우고서 원래의 단어가 무엇인지 유추하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FAI__' 라는 단어를 주고 빈칸에 어떤 철자가 들어갈지를 맞히라고 한 것이죠. 참가자들은 FAIR라고 쓸 수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인 FAIL이라고 답할 수 있었겠죠. 또 '__RRO__'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ARROW 혹은 ERROR고 답할 수 있었습니다. 러트치크는 참가자들을 반으로 나눠 빨간 펜과 검은 펜을 각각 나눠준 후에 이런 문제를 풀게 함으로써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답으로 적어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예상대로 빨간 펜을 쥐고 과제를 수행한 참가자들은 검은 색을 사용한 참가자들에게 비해 '오류'나 '저조함'과 관련된 단어를 더 많이 써냈습니다.




두 번째 실험에서 러트치크는 참가자들에게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 쓴 두 문단 짜리 글을 읽게 하고는 시제, 스펠링, 문법, 단어 선택 상의 오류를 찾아내라는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로 빨간 펜과 검은 펜을 각각 사용하게 했더니 빨간 펜을 사용한 참가자들이 평균 24.3개의 오류를 찾아낸 반면, 검은 펜을 쓴 참가자들은 19.1개의 실수를 잡아냈습니다. 빨간 펜이라는 장치가 참가자들로 하여금 오류를 잡아내겠다는 집중력을 더 키운다는 점을 시사하는 결과였죠. 빨간 펜을 쓰면 문법적 오류가 없어도 평가가 박해진다는 것이 세 번째 실험에서 규명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8학년 학생이 작성한 에세이를 읽고서 0점부터 100점까지 점수를 매기도록 하니 빨간 펜을 쓴 참가자들은 파란 펜을 사용한 참가자들에 비해 낮은 점수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저 색깔만 다를 뿐인데 그 결과가 유의미한 차이를 일으킨다는 사실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이 과연 객관적일까'란 의문이 들게 만듭니다. 색깔 뿐만 아니라 날씨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캐나다의 모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6년 간 입학 면접시험 결과를 분석한 연구에서 비가 내리는 날에 면접을 본 학생들은 날씨가 맑은 날에 면접을 치른 학생들에 비해 1퍼센트 정도 낮은 면접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1퍼센트의 차이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의과대학 입학시험의 총점으로 환산하니 10퍼센트의 차이에 해당했다고 합니다.2)


혹시나 이 글을 학교 선생님들이 보신다면 객관식 문제야 상관 없겠지만 학생들의 작문을 빨간 색연필을 들고 평가하는 일은 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면접 보러 가는 지원자들은 일기예보에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평가나 판단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쉽사리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평가의 객관성은 신기루입니다.


태풍 덴빈이 지나간 후, 오늘은 하늘이 푸르고 빛이 가득합니다. 오늘 면접을 보러 가는 지원자들은 어제 면접 본 지원자들에 비해 자신감을 가져도 될 날씨입니다. ^^



(*참고논문)

1) Rutchick, A., Slepian, M., & Ferris, B. (2010).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word: Object priming of evaluative standards,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Vol. 40(5)


2) Redelmeier, D., & Baxter, S. (2009). Rainy weather and medical school admission interviews,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Vol. 181(12)


반응형

  

Comments

댓글을 달면 행복해집니다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