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좋은 판단을 하려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근거 있고 더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이 좋지 않은 판단을 이끈다는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의사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이득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근거를 보강하려고 합니다. 대상이나 상황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가진 편향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상투적인 격언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헤브루 대학의 일란 야니프(Ilan Yaniv)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어떤 음식을 보여주고 칼로리를 맞혀보라는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음식 이름을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칼로리 값을 쓰면, 곧바로 5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 음식에 대해 예상한 값이 컴퓨터 화면 상에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그 데이터를 보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예상값을 기입했죠. 야니프는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에게는 자신의 예상값을 최종 기입하지 말고 '당신과 짝지어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 음식의 칼로리가 얼마라고 예상할 것 같은가?'에 답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최종적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죠.
'자기 입장'에서 판단한 참가자들보다 '타인 입장'에서 판단한 참가자들이 최초 예상값을 더 많이 수정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자기 입장' 참가자들은 5명의 의견을 보고 나서도 최초값을 고수하는 경우가 50.3%에 달했지만, '타인 입장' 참가자들은 16.8%만 최초값을 유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도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전체적으로 '타인 입장' 참가자들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칼로리 값이 '자기 입장' 참가자들의 것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입장' 참가자들의 평균 절대 오차가 77.5였는데 반해, '타인 입장' 참가자들은 그 값이 62.8이었으니 말입니다.
간단한 실험이지만, '타인은 어떻게 판단 내릴 것 같은가'라 질문에 답한 값이 오차가 적었다는 사실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조언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어제의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질문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실제에 가깝지 않은 판단을 내릴 위험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겠죠.
이와 비슷한 실험이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Daniel T. Gilbert)에 의해 실시되었습니다. 길버트는 여학생들에게 특정 남학생과 5분간의 '스피드 데이트'를 실시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남학생과 데이트를 마친 첫 번째 여학생은 남학생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쓰고 그것을 100점 척도로 평가했습니다. 길버트는 두 번째 여학생을 초대하여 남학생의 프로필과 사진을 보여 주거나, 첫 번째 여학생이 남학생과의 대화에 대해 쓴 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 남학생과의 데이트가 얼마나 즐거울지 100점 척도로 예상해 보라고 했죠. 그리고 남학생과 5분간 데이트를 즐긴 후에도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데이트하기 전 남학생의 프로필을 본 경우보다 첫 번째 여학생이 남학생과의 대화에 대해 쓴 글을 본 경우에 더 정확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첫 번째 여학생의 의견을 참조할 때 오차가 49%나 줄어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여학생들 중 75%가 남학생의 프로필 정보를 볼 때 데이트의 즐거움을 더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게다가 84%의 여학생들은 미래에 만날 남자의 프로필 정보가 있으면 그 남자와의 데이트가 어떨지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도 믿었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해서 더 나은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라 타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정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기에 판단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타인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거나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가 실리적입니다. 여러 의견을 듣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 독선의 위험을 피할 줄 아는 현명한 의사결정자라는 점을 새기기 바랍니다. '네 이웃의 의견을 탐하라.' 뛰어난 의사결정자가 지켜야 할 계명 중 하나입니다.
'[연재] 시리즈 > 의사결정의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야 의사결정을 잘할까? (0) | 2012.06.12 |
---|---|
토론 시작할 때 각자의 의견을 묻지 마라 (2) | 2012.06.05 |
평가 받기 전, 상사에게 사포를 만지게 하라 (2) | 2012.05.31 |
마감일이 닥쳐야 일이 잘 될까? (8) | 2012.05.30 |
생각의 속도가 빠르면 리스크가 커진다 (0) | 2012.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