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은 독약이다   

2011. 5. 1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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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기업들이 매년 9월 정도되면 슬슬 내년도 예산계획 수립(사업계획 수립이라고도 함)에 돌입합니다. 경영기획에서 내년도 사업에 관한 대략의 지침을 내려주면 각 사업부나 부서들이 정해진 포맷에 맞춰 달성하고자 하는 매출 목표과 비용 목표 등을 잠정적으로 결정합니다. 경영기획에서는 그것들을 취합하면 임원회의를 통해 세부적인 수치를 조정하고 전사 예산계획을 확정하는 프로세스를 거치게 됩니다. 예산계획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돌아가면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작업이 완료되겠죠.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만들어 낸 예산계획(짧게 말해 '예산')이 해가 바뀌고 나서도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환경에 따라 매출이나 비용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만일 여러분의 회사가 환율에 굉장히 민감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갑작스런 환율 폭등(혹은 폭락)으로 인해 작년 말에 세운 예산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환율 때문에 구매비용이 커져서 예상했던 이익을 달성하지 못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경영기획에서는 다시 각 사업부와 부서에게 소위 '수정 예산 수립'을 지시합니다. 작년 말의 시점과 달라진 점을 반영하여 매출 목표와 비용 목표를 새로 잡아서 올리라는 소리죠. 1월이나 2월에 이런 예산 수정 과정이 한번 정도 진행된다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어떤 회사는 예산 수정 작업을 3~4월까지 수차례 계속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반기가 거의 다 된 5월에도 예산 수정 때문에 현업에 방해를 받는 회사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 만들어낸 예산계획이 사업 수행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만일 어떤 학생이 100점 받으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공부를 하다보니 80점 밖에 못 받을 것 같으니까 "그래, 90점으로 목표를 낮추자" 라고 정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학생의 본래 목적인 '공부를 잘하는 것'을 달성하도록 이끌어 줄까요? 

예산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지향점을 알려주고 돌발변수에 대한 대처 방향을 일러줍니까? 이 질문을 긍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예산계획은 말 그대로 미래를 미리 예측하여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지만, 많은 기업에서 벌어지는 실상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발생한 내외부 환경의 변동을 반영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 이게 아니다. 바꾸자!" 라는 식으로 수정된 예산계획이 과연 사업을 수행하는 데에 어떤 혜안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런 식의 예산계획 관행은 백미러만 보고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산계획을 수립하는 본래의 목적은 사업의 지향점을 분명히 설정하고 그것을 구성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목적은 퇴색하고 구성원들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산계획은 곧 '표에 숫자 채우기' 작업으로 전락합니다. 예산을 수립하면서 얻은 여러 가지 정보를 실제로 활용하는 기업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정보들이 더 중요한데도 실제로 예산결정 회의 때 설왕설래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숫자'입니다. "매출 목표가 왜 이리 작냐?" 혹은 "너무 과도한 매출 목표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논쟁을 거듭해서 만들어진 예산계획에는 숫자가 가득 적힌 표만 눈에 띕니다. 그런 다음 예산계획을 구성원들에게 던져주면서 "이것을 준수하라!"고 지시 내리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구성원들이 아니라 경영진들입니다. 상황이 호전되거나 악화되면 곧바로 예산을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리니 말입니다.

이렇게 별로 쓸모가 없는 예산계획을 세우느라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지 면밀히 따져보면, 예산계획의 무용성이 금방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예를 들어 예산계획 수립에 3개월 정도(예산 수정 과정까지 포함하여)가 소요되고 구성원 중 20% 정도가 부서, 사업부, 전사 단위의 계획 수립에 동원된다고 가정해 보죠. 동원된 구성원들이 매일 2시간 정도 예산계획에 노력을 투여할 경우, 예산계획 수립에 소요되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요? man/day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겠죠.

예산계획 수립 비용(man/day) = 전 직원 수 * 3개월 * 20일 * (2시간/8시간) * 20%


만일 전 직원 수가 1,000명이고 평균 man/day가 10만원이라고 하면, 3억 원 돈이 예산계획 수립에 소요되는 것과 같습니다. 보수적으로 가정했는데도 이 정도 금액이 나옵니다. 전략적 혜안을 주지 못할 뿐더러 매번 수정되는 것에 들이는 비용 치고는 상당한 금액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과도한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니 "어차피 월급이 나가는데 직원들이 예산계획을 수립한다고 해서 실제로 비용이 더 나가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더군요. 회계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예산계획 수립에 골몰하느라 고객 서비스를 위해 발로 뛰고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시간들이 적어진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간과하는 말입니다.

많은 기업에서 예산계획을 수립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실적을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출, 비용, 이익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가를 보고 성과급을 주거나 포상을 하는 데에 예산계획이 쓰이죠. 예산계획이 보상의 잣대로 쓰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산계획을 초과달성했는데도 성과급을 주기 '뭣한' 상황이 종종 발생합니다.

사업부나 부서가 잘해서 예산을 달성한 게 아니라, 산업이 전반적으로 호황이어서 실적이 올라간 것이라면 성과급을 줘야 할까요?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경쟁사가 우리보다 더 잘했을 경우에도 성과급을 줘야 할까란 질문에도 '예'라고 답할 수 있는지 생각하기 바랍니다. 예산계획은 '내부에서 정한 기준'이라서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계획을 성과를 판단하는 잣대로 쓴다면, 구성원들에게 "전략적 사고보다는 경영진과 예산계획을 놓고 어떻게 협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됩니다. 사업 수행 능력보다는 소위 '말빨'이 성과급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어 버리죠. 또한 성과를 '띄우려는' 눈속임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기 쉽습니다. 가장 빈번한 눈속임은 채널 스터핑(channel stuffing)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닌 자동차 회사에서는 이상하게도 월말에 판매대수가 집중되곤 했습니다. 왜 그런지는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비용 목표를 맞추려고 싼 부품을 사용하는 바람에 반품이 쇄도하고, 인력 채용 규모를 줄여서 기존 직원들의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등의 부작용도 발생합니다. 이것 역시 '예산을 위한 예산 수립' 관행 때문에 빠져나가는 보이지 않는 비용입니다.

GE의 CEO 였던 잭 웰치는 "예산은 독약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산을 위한 예산 수립으로 얼마나 많은 인력들이 동원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술술 새는지 뒤돌아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예산이 아예 필요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금년 예산계획 수립 때는 '예산의 중용'을 지키기 위해 지금부터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 '지혜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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