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그로브의 책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를 옮기며...
제가 번역한 책이 이번에 출간되었습니다. 인텔의 CEO였던 전설적인 경영자 앤디 그로브(앤드루 S. 그로브)가 쓴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입니다. 아래의 '옮긴이의 글'로 책 소개를 대신합니다.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 관리자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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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연초부터 연이어 세 권의 책을 옮기느라 지친 나머지 잠시 번역 청탁을 거절하고 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텔의 회장이었던 앤드류 그로브의 책을 번역해 달라는 편집자의 이메일을 읽자마자 곧바로 요청을 수락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나는 1996년에 우리말로 소개된 이 책의 초판을 접했었는데 저자의 명성에 비해 내용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가 말하는 관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었지만, 번역을 위해 원문을 접하고 나서야 그렇게 오해했던 이유가 상당 부분 번역의 오류에 있음을 깨달았다. 번역하는 내내 경영학 사례에 항상 등장할 정도로 많은 기업들이 모방하고 싶은 기업, 인텔의 CEO가 직접 느끼고 직접 경험한 경영의 지혜를 내가 우리말로 다시 전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감정이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오곤 했다.
특이하게도 그로브는 일반적인 책들과 달리 리더십이 아니라 생산의 관점으로 ‘관리’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 책의 독자들 중 상당수가 관리와 생산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원자재를 기계에 공급하고 조립하여 완성품을 만들어내고 검사하는 일련의 생산 과정은 소위 ‘블루칼라의 일’이고, 직원의 성과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측정한 다음 알맞게 피드백하는 관리자의 업무는 ‘화이트칼라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더욱이 지금은 정보 혁명을 넘어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공장 굴뚝을 연상케 하는 생산이라니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관점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고정관념이고 편견이라는 이유를 그로브는 ‘레버리지’라는 말로 간명하게 설명한다. 요리사가 손님 테이블에 가져다 주는 식사를 완성품으로 간주한다면 관리자의 역할은 요리사가 훌륭한 식사를 낮은 비용으로 빠른 시간에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요리사가 한 번에 두 개의 달걀을 조리하고 두 대의 토스터를 조작함으로써 남들보다 2배의 레버리지를 달성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관리자의 일이다. 생산성과 완성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더 좋은 기계를 투입하고 더 숙련된 기사를 배치하듯이 관리자는 직원들의 ‘성과 창출 과정’에 본인의 지식과 기술을 투입하고 적절하게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1인분을 생산할 시간과 비용으로 2인분을 생산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관리는 곧 생산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회의와 교육, 전화 통화 등 자신의 하루 일정을 있는 그대로 공개한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관리의 레버리지를 높이는지를 예시하고 그런 활동이 ‘성과’라는 아웃풋을 산출하는 생산 활동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한다. 이 책의 제목이 ‘High Output Management’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로브는 중간관리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간절히 바란다. 중간관리자들은 CEO를 비롯한 경영자의 방침이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게 하려면 조직의 목표를 직원들에게 이해시키고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안내하는 존재로서 관리자의 중요성이 그 누구보다 높다고 그로브는 생각한다.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책의 미덕은 중간관리자들이 직원들과 일대일로 면담하는 방법, 올바르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법, 내일의 성과를 내다보는 계획의 과정, 그리고 아직도 생소한 개념인 ‘이중보고’와 ‘네트워크 조직’의 개념 등을 거대 글로벌 기업의 CEO였던 자가 친히 ‘가르친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로브는 CEO로 재직하는 동안 따로 자기 방을 갖지 않고 직원들 사이에 책상을 놓고 일할 정도로 현장 중심의 인물이었다. 본인이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하달하기보다는 여러 계층의 직원들과 격의 없는 면담과 피드백을 통해 사업 차별화의 전략적 방향에 공감대를 형성해 간 독특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아이디어는 중간관리자들을 다그치기만 하는 이상론이 아니라 직원들의 성과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임을 번역하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착각하는 CEO> 등을 쓴 저자로서 내가 개인적으로 반가웠던 점은 직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조직 경영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그로브가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현업에 적용해 왔다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을 그저 이론으로 이해하지 않고 직원들의 동기 요소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현장에서 관찰하는 도구로 손수 활용했다는 점 또한 그로브의 ‘과학적인 경영 마인드’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렇게 엔지니어적 관점으로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경영자를 나는 일찌기 보지 못했다. B2B 기업이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고 불리는,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케팅 프로그램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앤디 그로브의 끊임없는 관찰과 실험이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고 1년 후인 2016년 3월에 ‘영원한 편집광’인 그는 파킨슨병으로 사망했다. 4차 산업혁명이 인구에 회자되는 지금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부가가치의 진정한 창출은 생산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어느 것 하나 허투로 놓치는 법이 없는 그의 편집광적인 성격 덕분에 이 책이 나왔다. 그에게 감사하며 영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