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한 두 방울 내리는 12월의 오후. 몇 십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낡은 문을 여니 따뜻한 공기가 훅하고 얼굴을 감싼다. 담배냄새가 섞인 공기지만 커피향과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 때문인지 그리 역하지 않다. 바 구석에서 담배를 피며 신문을 읽던 야마다 씨는 고개를 들어 "오늘 날씨가 참 춥네요."라고 인사한다. 그럴 법도 하다. 이곳에서는 흔치 않게 기온이 영상 5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나이 들어 허리가 약간 굽은 마스터는 수줍게 웃으며 자리를 권한다. "도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선한 아저씨 인상이다. 목에 두른 검은색 나비넥타이가 귀엽다. 어디에 앉을까 하다 안쪽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실은 야마다 상이 연신 뿜어대는 담배연기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다. 여기는 후쿠오카에서 처음으로 찾은 깃샤텐(喫茶店, 다방) '깃샤 베니스'다. '깃샤 베니스'의 마스터 호리우치 도시야키 씨는 스물다섯 살 때 이 찻집을 열어 지금까지 (현재 나이는 모르지만) 수십 년을 영업 중이다. 그 세월이 가게 내부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다.


깃샤 베니스의 소박한 외부 모습



금년 여름, 홍대 부근의 어느 서점에서 <후쿠오카 카페 산책>(코사카 아키코 저)란 책을 우연히 접한 것이 이번 여행의 계기였다. 책으로 보는 여러 깃샤텐은 어느덧 '셀프 서비스'의 대형 프랜차이즈 까페에 익숙해진 나에게 그저 까페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다른 느낌을 전했다. 그렇다고 옛날 '역전 다방' 같은 곳에서 느꼈던 가벼운 질량감과 산만함과는 사뭇 달랐다. 짙은 나무색깔의 인테리어, 작은 의자가 한줄로 늘어선 긴 바, 벽장에 진열된 고풍스러운 커피잔과 기구들, 작은 창에 걸린 흰 색의 커튼, 오래된 앰프와 스피커... 그 모든 것들이 책에서 튀어나와 나에게 강한 커피향을 뿜어냈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간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마스터



 우리는 '브란도 코히'를 주문했다. 마스터가 산미와 탄맛 등 여러 가지 맛과 향의 원두를 블렌딩하여 자기네 찻집만의 커피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브란도 코히다. 그러니 깃샤텐에 가서는 '탄자니아'라든지 '르완다'라든지 하는 스트레이트 커피가 아니라 반드시 브란도 코히를 마시는 것이 나의 원칙 아닌 원칙이다. 커피에 곁들여 먹을 음식이 없으면 섭섭하겠다 싶어 '앙꼬 핫케잌'을 추가로 부탁했다. 마스터는 주문을 받자마자 원두를 갈아서 '사이펀'이란 추출 기구로 커피를 뽑아준다. 압력 차를 이용하여 알갱이에서 커피액만 뽑아내는 모습이 마치 중학생 때 과학실에서 선생님이 플라스크와 비이커를 알콜램프로 가열하며 보여주던 실험과 흡사하여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스터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우리의 눈을 의식한 듯 빙긋 웃으며 사이펀 속 커피 알갱이를 휘젖는다.


사이펀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마스터



후쿠오카 깃샤텐에 와서 처음으로 마시는 커피. 한 모음을 혀에 담으니 쌉쌀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탄맛이 강하여 평소 산미가 있는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에겐 중량감이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구수한 끝맛이 매력이다. 함께 먹는 핫케잌의 달콤함과 어우려져 한껏 풍미를 더하는 커피맛이다. 한 잔으로 끝내기엔 아쉬운 맛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하니 마스터가 한쪽 구석의 책꽂이에서 뭔가를 찾아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니, <후쿠오카 카페 산책>이라는 책 아닌가! 그것도 원서가 아니라 한글판이다. 관광객 중 누군가가 이 책을 마스터에게 선물한 모양이다. 책을 펼쳐 보니 한글로 적힌 메모가 가득하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우리보다 먼저 '깃샤 베니스'를 찾아와서 적어 놓고 간 코멘트들이다. 한글판 책은 2011년에 벌써 나왔으니 그럴 법 했다. 깃샤텐 투어의 '초창기 멤버'라고 어깨를 으쓱했던 우리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하지만 '지각 손님'이면 어떤가? 커피 한 잔으로 일상의 신산함을 잊고 '여생을 보내는 듯한' 편안함을 스스로에게 선사하니 이보다 더 저렴한 환각제가 어디 있는가?



일본 깃샤텐에서 이렇게 생크림을 얹어 먹는 게 포인트


단팥이 올라간 핫케잌



바의 구석 자리에 앉아 무엇을 정리하는 듯한 마스터의 부인 쓰야코 씨는 야마다 씨와 뭔가를 계속 이야기한다.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시시콜콜한 날씨 이야기나 동네 이웃 소식이리라. 그나저나 야마다 씨는 갈 생각을 않는다. 비 대신 눈이 오면 좋을 바깥 풍경이지만 후쿠오카에서 눈을 기대하다니, 커피에 취한 탓이리라.


부인 쓰야코 씨의 모습



다음 날에도 우리는 '깃샤 베니스'를 찾는다. 처음엔 갈 계획이 없었다. 부근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출출한 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버스를 내려 힘차게 문을 연다. 마스터는 '아, 또 오셨네'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는다. 벌써 단골이 된 느낌이다. 우리는 전날 쓰야코 씨가 앉았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브란도 코히'는 기본인데, 무엇으로 출출함을 달랠지 메뉴판에 코를 박고 탐색하는 시간이 길다. 일본에 왔으니 케첩으로 맛을 낸 '나폴리탄'을 먹어 봐야겠다. 그리고 '커피 젤리'도 무슨 맛인지 궁금하니 주문해야겠다.


마스터는 전화기에 입을 대고 '나폴리탄'이라고 말한다. 아마 윗층에 있는 부인 쓰야코 씨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노포'들은 이렇게 영업점과 살림집이 아랫층과 윗층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쓰야코 씨가 요리했을 나폴리탄을 포크로 떠 한 입 먹으니 단순한 케첩맛 스파케티가 아니라 중국집의 짬뽕이나 볶음밥에서 날 법한 '불맛'이 느껴진다. 이곳에 오면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추천! 커피 젤리는 젤리의 식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추천할 수는 없지만 달콤한 시럽을 부어 젤리를 오래 입에 담고 씹으면 고소한 커피향이 코 속으로 퍼지는 느낌이 새롭다.


불맛이 매력적인 나폴리탄


커피젤리


어제 본 야마다 씨 대신 오늘은 유키꼬 씨가 바통을 이어 받은 듯 바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며 마스터와 수다를 떤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한국 어디?'라고 묻고서 지난 번에 서울에 여행 갔었는데 엄청 추웠다고, 그렇게 추울지 몰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긴 겨울 평균기온이 영상인 후쿠오카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시베리아처럼 여겨졌겠지(간혹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추우니까). 깃샤텐은 단순한 까페가 아니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동체다. 야마다 씨와 유키코 씨 같은 동네 사람들이 장을 보러 가다가 들르고 저녁 준비가 하기가 싫어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떠는 곳. 우리 동네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좀 좋으랴. 셀프 서비스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급속도로 외로워졌다.


잡지 표지모델로 나온 마스터



마스터는 이번에 '후쿠오카'라는 잡지(2014년 9월 발행)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리고 표지의 얼굴을 가리키며 본인의 '가오'란다. 알고 보니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어느 소년이 마스터의 얼굴을 보고 즉석에서 그려준 그림이라고 한다. 마스터의 특징을 이렇게 잘 잡아내다니, 천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용기를 내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마스터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하얀 커튼이 조그만 창을 가리고 있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약간은 어색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어깨동무라도 할 걸...



추억의 다방 성냥



자리를 일어나려는데 마스터는 우리에게 뭔가를 쥐어준다. '깃사 베니스'란 상호가 찍힌 작은 성냥갑이다. 예전에 다방에 가면 항상 놓여져 있던, 하지만 이제는 보기가 어려운 '가게 홍보 성냥갑'을 후쿠오카에서 다시 손으로 만지니 감회가 새롭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다시 마주한 느낌이다. 약간은 감격스러워서 코끝이 찡하다. 많은 것들이 사라진, 내가 사는 곳의 옛날이 이곳에서는 아직은 현재로 존재한다. 시간여행자의 노스텔지어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문을 닫고 나와 가게를 바라보며 이 공간이 앞으로도 오래 남기를 바란다. 그때도 검은색 나비넥타이를 한 마스터가 구부정한 자세로 커피를 뽑아주겠지, 하는 믿음이 깃샤텐을 다시 찾고픈 매력이다. 언젠가 다시 와 불맛 나는 스파게티와 브란도 코히를 배부르도록 먹어 주련다. 


오늘도 후쿠오카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눈이 와도 이상할 법하지 않은, 커피향처럼 평범한 시간이 내 머리 위에 떠돌고 있다. 이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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