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고통이 클 땐 진통제를 먹어라?   

2014. 4.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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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무거운 액자가 발등 위로 떨어진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마 그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런 감각이 빠르게 온몸을 경직시키고 말 것이다. 뇌에서 이러한 물리적인 고통이 처리되는 부분은 ‘전방 대상피질'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영화 <통증>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권상우는 누군가가 상처를 내거나 가격을 해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순’역을 맡았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고장 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방 대상피질은 물리적 고통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거절 당하거나 버림 받았을 때 느끼는 ‘사회적 고통’과도 깊이 연관된 부분이라는 사실이 뇌과학자들의 연구로 규명되었다. 물리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은 둘 다 뇌의 같은 부분에서 처리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남순’은 ‘동현(정려원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로부터도 마음의 상처도 느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야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리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의 연관성을 이미 알고 있던 심리학자 C. 네이선 드월(C. Nathan DeWall)과 동료 연구자들은 '물리적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가 사회적 고통을 감내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진통제를 먹으면 전방 대상피질의 활동을 둔화시켜서 실연을 당했거나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등 타인으로부터 사회적 연결을 거부 당함으로써 겪는 고통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던 것이다.



출처: www.nydailynews.com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드월은 25명의 건강한 대학생을 실험에 참여시켰다. 참가자들 중 절반은 500밀리그램 짜리 진통제를 아침에 일어나서 두 알, 잠자리에 들기 한 시간 전에 두 알을 복용해야 했다. 드윌은 나머지 절반의 참가자들에게는 동일한 모양으로 생긴 가짜약(위약)을 삼키게 했다.


이렇게 수일 간 진통제나 위약을 복용한 참가자들은 실험 마지막 날에 연구실을 방문하여 드월이 주관하는 일종의 '공 주고 받기 게임’에 참여했다. 각 참가자는 다른 두 멤버들과 함께 3인 1조가 되어 컴퓨터 상에서 게임을 진행했는데, 사실 다른 두 멤버들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로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존재였다. 드월이 게임을 이렇게 조작한 이유는 참가자를 무시하고 자기네끼리만 공을 주고 받으면서 ‘왕따시키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거부될 경우 참가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관찰할 목적이었다.


참가자들은 게임이 끝난 후에 “나는 다른 멤버들에게 따돌림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는 식의 질문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사회적 고통을 경험했는지 답했다. 그러자 진통제를 복용했던 참가자들이 위약을 먹은 참가자들에 비해 고통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만으로 진통제가 사회적 고통까지 경감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드월은 실험 결과를 좀더 확인하기 위해서 참가자들을 ‘기능성 자기공명 장치(fMRI)’ 안에 눕도록 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공 주고 받기 게임’을 진행하게 했다. fMRI를 사용하면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좀더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진통제를 복용한 참가자들이 공 주고 받기에서 배제될 때 전방 대상피질의 활동이 위약을 먹은 참가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둔화된 모습이 관찰되었다. 또한 진통제는 정서적인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부분인 ‘전전두엽 피질’의 활동도 둔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진통제가 물리적 고통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pain2011



이 연구에서 드월은 실험의 효과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대학생들에게 장장 3주 동안 진통제를 복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진통제를 그렇게 많이 먹어도 되는가’라는 걱정이 앞서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거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서 가슴이 아프고 자괴감이 못 견딜 정도라면, 진통제 한 두 알 먹고 잠시 잠을 청하는 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진통제 중독을 경계해야 한다. 영화에서 ‘남순’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도 없어.”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실연의 고통을 잠재운답시고 진통제를 장기복용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 바란다. 진통제에 찌든 전방 대상피질 때문에 다시 찾아올 사랑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진통제는 약사에게, 실연은 새로운 사랑으로!



(*본 글은 <샘터> 2014년 4월호 '과학에게 묻다' 코너에 게재되었던 저의 칼럼입니다. 또한, 예전에 이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수정/보강한 것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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