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sm 2] English Horn   

2008. 1. 1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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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공원에 앉아 나는 맥주를 마시지. 밤 10시의 부드러운 어둠은 맥주 속에 섞여들어 나는 그것도 함께 마시지.
 
이런 상상을 해볼까? 여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아파트에는 어느 병약한 소녀가 살고 있어.
소녀는 병이 심해져서 학교를 쉬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항상 방에만 갇혀 지내지. 외로움은 어느새 그녀의 친구가 되어 버리지. 

소녀의 창은 하얀 커튼이 항상 드리워져 있고, 바람이 이따금 커튼을 흔들 때면, 밤하늘 한 조각이 비껴 보이지. 그리고 책상 옆에 세워 둔 까만 케이스 속에는 소녀의 외로움과 공명하는 잉글리쉬 호른이 들어있지.

소녀는 은빛이 도는 까만 머리칼을 손으로 잠시 쓸어 내리다가 생각난 듯 케이스를 열어 잉글리쉬 호른을 꺼내는 거야. 그리곤 입술을 리드에 잠깐 대 보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운지법을 기억해 내려고 미간을 좁히지.

그때, "안녕, 운지법 따위는 필요 없어. 너의 숨결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면 돼." 하며 잉글리쉬 호른은 말하지. 소녀는 그 말에 자신감을 얻게 돼.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예전에 어느 FM방송에서 들었던 녹턴을 연주하는 거야.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이 떨리고 머리카락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거리지. 잉글리쉬 호른의 음표는 방안 가득한 어둠을 1밀리 1밀리씩 천천히 밀어내며 방 안 전체에 고였다가 어느새 창틈으로 새어 나가지.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거야. 그 음율 속에서 소녀의 외로움과 심약함과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거야. 그래, 공명이란 거지, 그건. 소녀도 나도 외로운 시간을 살아왔고, 그리운 시간을 향하여 살게 될 테지. 소녀도 나도 쓸쓸한 사랑을 했던 적이 있었고, 다가오는 사랑을 어쩔 줄 모르는 거지니까.
 
잉글리쉬 호른의 음표는 내 발 아래 쌓여 가지. 어둠은 깊어만 가고, 소녀도 나도 어느새 지쳐가지. 5밀리쯤 남은 맥주처럼 누군가가 채워 주길 기다리는 모습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소녀와 잉글리쉬 호른를 상상하며 나는 한껏 그리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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