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으면 보수적이 된다   

2012. 4. 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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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죠. 고객의 취향이 빠르게 변화하는 데다가 우리가 가진 제품으로는 그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갑니다. 게다가 기존 경쟁사는 미리 그런 변화를 감지했는지 적절한 시기에 신제품을 출시해서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지금까지 누리던 경쟁력이 한순간에 사라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회사는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임원들이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만들어낸 전략은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 느껴집니다. 매년 의례적으로 수립하는 사업계획서의 내용에 긴급함과 위기감을 강조하는 형용사와 부사가 여기저기 경고를 나타내는 빨간 딱지처럼 덧붙여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듭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은 찾아보기 힘들고 기존의 사업을 기존의 방식대로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다들 CEO의 입만 쳐다 보며 말입니다. 사실 이 상황은 가상의 사례가 아니라 모 회사에서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많은 기업들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루도록 요구 받으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지만 결국 기존의 것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기존의 제품, 기존의 방식, 그리고 기존의 구조 속에서 용인되던 기득권을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하고 혁신하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에도 긴급 대책 전략은 현상(status quo)을 '열심히 유지'할 것임을 강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더 열심히 영업 활동을 하겠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하겠다', '시장 조사를 지금보다 더 자주 하겠다', 'KPI 타겟을 더 높이겠다' 등 열심히 하겠다는 말처럼 보수적인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위급하고 시간이 별로 없을 때 이렇게 보수적인 전략에 머물고 마는 걸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는 스콧 아이델만(Scott Eidelman) 등이 수행한 실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컴퓨터 모니터 상에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된 50개의 용어를 떠오르게 하고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것을 지지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참가자들 중 절반에게 시간적인 압박을 가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550밀리초) 용어를 보여주고 빠른 시간 내(1550밀리초)에 답하도록 한 것이죠. 반면 다른 절반의 참가자들에게는 용어를 스크린 상에 오래 보여 주고 충분히 생각한 후에 답하게 했습니다. 이 과제를 수행한 후 연구자들은 보수주의를 뜻하는 단어 25개와 자유주의를 나타내는 25개 단어를 참가자들에게 제시하고 지지 여부를 7점 척도로 응답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분석 결과, 시간의 압박을 받은 참가자들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한 참가자들에 비해 높게 나타났습니다. 즉 시간에 쫓기면서 버튼을 눌러야 했던 참가자들이 보수주의적인 단어를 더욱 지지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적 성향'은 시간의 압박 여부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시간적인 여유 없이 중요한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기업들이 혁신적으로 사고하기가 심리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아이델만 등은 시간적인 압박 조건 뿐만 아니라 '인지적인 부담'이 가중되는 조건 하에서도 사람들이 보수적인 성향이 높아짐을 또 다른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15분 동안 사회적 인식에 관한 자료를 완성해야 했는데, 참가자 중 절반은 자료를 완성하는 동안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소리의 톤(tone) 변화가 몇 번 있었는지를 동시에 세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인지적인 압박을 받아야 했던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보수주의적인 성향이 높아지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은 낮아지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대처해야 할 과제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상황에서 조직의 전략이 혁신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지고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쪽으로 경도된다는 경험적인 사실이 실험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이델만의 실험을 요약하면 시간적 압박과 인지적 부담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덜 하도록 만들고 생각을 덜 하게 되면  보수주의적 성향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말로 간단히 정리가 됩니다. 하지만 아이델만은 이 실험의 결과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면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즉 '보수주의자들은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죠. 아이델만은 이 실험이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짧은 생각이 사람들을 현상에 머무르도록 만든다는 것으로 실험의 의미를 제한합니다. 자유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시간적 압박과 인지적 부담에 의해 쉽게 손상된다는 의미로 이 실험을 해석하면 곤란하겠죠. 아이델만의 말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경험, 역사, 가치 등을 통해 이루워진 다차원적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쫓기고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터질 때 조직의 브레인들은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고, 그런 조급함은 보수적인 성향을 자극하여 그저 더 많이 더 열심히 하겠다는 전략에 머물게 만듭니다. 혁신에 힘을 쏟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려 합니다. 하지만 끄려고 할 때마다 발등의 불은 몸 전체로 번지고 맙니다. 위급하고 대처해야 할 과제가 많을 때 오히려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려고 혁신의 기회를 탐색해야 합니다. 시장의 구조가 변하고 고객의 취향이 예전과 판이하게 다른 마당에, 경쟁자와 고객이 모두 떠난 빈 터에서 더 많이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직의 경영자와 직원들이 아무 생각 없으면 보수주의자가 되어 스스로 현상에 머무르려는 보수주의적 경영의 피해자가 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내놓는 전략이 풀빵 찍어내듯 매번 비슷하다면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에 의해 아무 생각없이 조직이 흘러간다는 의미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회사는 지금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Low-Effort Thought Promotes Political Conserv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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