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합시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   

2012. 2. 2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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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샤이 댄지거(Shai Danziger)는 수감자의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관들이 내린 의사결정 패턴을 살펴보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밥을 언제 먹었느냐가 가석방 신청을 통과시키느냐 기각시키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뚜렷하고 지대하게 말입니다. 댄지거가 8명의 가석방 심사관들이 내린 1112건의 심사건을 수집해보니, 한 명의 심사관은 하루 동안 14건에서 35건 정도(평균 22.6건)를 심리했고, 하나의 신청건에 대해서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평균 6분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습니다.

또한 심사관들은 심리를 진행하다가 두 번의 식사 겸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심리를 진행하다가 9시49분에서 10시27분 사이에 새참을 먹고, 12시46분에서 2시10분 사이에 점심식사를 했죠. 새참을 먹기 전에 심리관들은 평균적으로 7.8건의 심리를 진행했고, 새참을 먹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11.4건의 신청건을 처리했습니다. 심리관들은 전체적으로 가석방 신청의 65% 정도를 기각했습니다.




댄지거는 1112건의 가석방 신청건들을 심리 받은 시간대별로 정렬하고 승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시간대에 심리를 받느냐가 승인과 기각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아침에 처음 심리를 받거나 식사시간 후에 바로 심리를 받는 가석방 신청건들은 평균적으로 65%의 승인률을 기록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승인률은 뚝뚝 떨어지는 패턴이 발견됐습니다. 그렇게 승인률이 급감하다가 식사시간에 임박해서는 승인률이 거의 0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또한, 식사시간 직후에 심리한 최초의 3건과 식사시간이 임박할 때 처리한 마지막 3건을 비교하니 전자의 경우엔 52~61%의 승인율을, 후자의 경우에는 9~27%의 승인율을 보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운이 좋게 아침에 제일 먼저 심리를 받거나 식사시간 후에 바로 심리를 받는 수감자들은 가석방 승인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식사할 시간에 임박할 때 자신의 가석방 여부를 심리 받는 수감자들은 가석방될 확률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죠. 

심사관들은 스스로 가석방 승인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피로도와 혈당 수치가 가석방 승인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가석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서 죄질의 높고 낮음, 수감 태도, 수감자의 교정 정도 등은 '밥'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습니다. 정의(Justice)와는 한참 거리가 먼 '밥'이라는 요소가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죠.

가석방 심사관들의 '휴식 및 식사' 여부가 의사결정의 중요한 변수라는 댄지거의 연구를 기업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종류의 심사, 평가, 승인은 대상이나 내용의 본질보다는 참석자의 피로도와 배고픔 정도에 따라 좌지우지될지 모른다는 걸 추측할 수 있습니다. 휴식과 식사시간 후에 처음 면접하는 입사지원자들은 높은 합격률을 보이고, 운이 없게 식사시간이나 퇴근시간에 임박할 때 면접관을 만난 지원자들은 어쩌면 실력과는 무관한 '밥(즉 혈당)'이라는 요소 때문에 불행하게도 떨어질지 모릅니다(지원자 데이터가 충분한 회사에서 댄지거의 연구와 비슷한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매년 벌어지는 인사평가도 상사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가, 얼마나 배가 고픈가에 따라 부하직원의 실력과는 별개로 관대하게 혹은 가혹하게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밥'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사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보가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는 상당히 많습니다. 독일의 연구자들은 법률 전문가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형량을 개별적으로 판단하라고 요청하기 전에 한 그룹의 전문가들에게는 1과 2만 나오는 주사위 한 쌍을, 다른 그룹에게는 3과 6만 나오는 주사위 한 쌍을 던지게 했습니다. 두 개의 주사위 숫자를 합하면, 3이나 9를 얻게 되겠죠. 주사위를 던진 후에 범죄자의 형량이 주사위 숫자 합보다 큰지 작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형량을 정하게 했죠.

법률 전문가들이 제시한 형량은 1개월부터 12개월까지 다양하게 분포했는데, 숫자의 합이 3인 주사위를 던진 그룹은 평균 5.28개월, 9인 주사위를 던진 그룹은 평균 7.81개월의 형량을 내렸습니다. 주사위 숫자라는 정보는 형량에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가 나왔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도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함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릴 때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자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상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 없는 상황의 조건들이 평가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거나(피 속의 혈당이 충분하거나) 정신이 맑을 때는 과감하거나 관대한 결정을, 배가 고프거나 어깨가 처지며 피로가 업습할 때는 현상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발동하여 새로운 사안을 거부하거나 '까칠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평가나 의사결정의 객관성은 지표와 판단기준이 아무리 정교할지라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혹시 지금 무언가를 평가 받거나 결재를 받는다면, 의사결정자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밥 먹고 합시다!" 예상보다 좋은 평가를 받거나 결재를 빨리 받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참고논문 : Extraneous factors in judicial decisions )
(*참고논문 : Playing Dice With Criminal Sent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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