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이란 말, 쓰면 안되나?   

2009. 6. 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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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대학에서 열린 포럼에 패널로 참석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해 대학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통섭'의 관점에서 논의하는 자리였다. 과학의 관점에서 경영학을 바라본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의 지은이인 덕에 작년에 이어 패널로 참여했다.

여러 패널들(나를 포함한)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으나, 현재까지의 이공계 교육이 창의성과 분석력, 그리고 실행력을 함양하는 데 부족하다는 점과, 대학교육이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 포럼에는 저술가로 유명한 분이 기조연사로 초청됐는데, 패널들의 발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내 불편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알고보니 이유인 즉 '통섭'이란 용어 때문이었다. 나도 '통섭 교육에 대한 제언'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으니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으리라.

그분은 패널들의 발표가 다 끝나고 발언권을 신청하더니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통섭이란 말은 쓰면 안 됩니다. 통섭으로 번역한 consilience란 단어는 미국에서 이미 죽은 말, 사어(死語)입니다. '통섭'은 원효대사의 말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Pressian(프레시안)에 김지하 씨가 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쓰면 안 되는 말입니다."

대략 이런 의미의 발언이었다('통섭이란 말을 쓰면 무식한 사람입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화가 좀 났는지 그분은 위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는 급히 퇴장하셨다. 지금까지 통섭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논조로 진행된 포럼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멍한 분위기였다.

설령 '통섭'이란 말이 써서는 안 될 용어라 할지라도 좀 심했다 싶다. 그리고 비록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이 개진됐다해도 포럼 말미에 보인 그분의 행동은 참가자 모두를 '뻘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분이 지적한 김지하 시인의 글을 검색해서 읽어봤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면 프레시안의 기사가 뜬다.

최재천ㆍ장회익 교수에 묻는다 (프레시안 2008년 10월 8일자)

'휴우... 왜 이렇게 길어?' 억지로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독해력과 교양이 부족한 탓이라 여겨 한번 더 읽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도통 되지 않았다. 현학적이고 난해하며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난무하는데, 범인인 나는 김지하 시인이 어떤 논리로 통섭이란 말의 사용을 금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줄기차게 나열된 의문문들, '네가 뭘 알아?'식의 문장들, '공부하라'식의 충고들도 읽기 불편했다. 그게 김지하 시인의 스타일일지 모르겠으나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난독체(難讀體)의 문체에 질려 버렸다. 포럼의 '그분'은 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읽어보라고 한 걸까? 고개가 갸웃거리다 못해 푹 꺾인다. 김지하 씨의 아드님이 '시를 좀 쉽게 쓰라'고 충고한 이유를 알 듯하다. 김지하 씨의 논거는 각자 파악하기 바란다.

하여간,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통섭이란 말로 번역한 consilience란 단어가 미국에서 이미 죽은 말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걸 쓰지 말아야 할까? 사어를 들여와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개념을 덧대어, 혹은 다른 의미로 변화시켜 쓰면 안된다는 법이 있을까? 오히려 자기네 사어를 살려내어 잘 쓰니 칭찬 받아야 할 일 아닌가?

고유한 문화란 없다. 남의 문화가 우리 문화와 서로 섞이다가 새로운 것이 창조되기도 하고 서로 경합하다가 어느 하나만이 생존하기도 한다. 남의 나라에서 쓰이는 규칙을 우리가 준수해줄 의무는 없다. '통섭'이란 말의 기원이 어떻든, 또 그게 사어이든 아니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학제간 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면, 우리가 채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축제용 폭죽으로 쓰이던 중국의 화약을 유럽에서 무기용으로 썼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본래 중국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짜장면을 만들지도 먹지도 말아야 할까? 단어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여러 나라를 건너다니면서 변화하기 마련이다. 우리 식대로 체화됐다면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어라며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논거가 옹색하다.

Consilience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생물학을 중심해 놓고 나머지 학문들을 줄세우고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렴풋이 김지하 시인의 글을 추리(맙소사 추리까지 해야 하다니!)하면, 그가 그토록 통섭이란 단어에 불편을 느낀 이유는 바로 '생물학 중심'의 통섭을 윌슨이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나 또한 생물학이 가운데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윌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윌슨이 평생 연구한 분야가 생물학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결론'에 도달한 거라고 너그럽게 이해하면 될 일이다. 윌슨이 생물학 중심 사상을 포기만 한다면 그의 Consilience론은 이 시대에 화두가 될만한 훌륭한 담론이다.

이미 통섭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의미의 공감대'를 형성한 용어가 됐다. 분편화되고 단절된 학문들을 가로지르고 엮어서 새로운 지혜를 얻자는 사회운동으로서 통섭은 이미 하나의 지향점을 획득했다. 통섭. 이 단어의 출신성분을 따져서 '쓰고 안 쓰고'를 정할 일이 아니다.

김지하 시인은 서양의 사상이 제일인 양 떠들다간 지적(知的) 식민지 꼴을 못 벗어난다고 일갈한다. 우리 고유의 사상이 더할나위 없이 좋다면, 좀 쉽게 써주길 바란다. 그래야 많은 이들이 이해라도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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