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로 미래를 관측하라   

2008. 8. 1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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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세계경제에 파장을 일으키고 유가와 원자재값이 크게 요동치는 등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날로 커져감에 따라 많은 기업들은 다가올 미래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대다수의 경영자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할수록 정교한 데이터를 사용하여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확실성을 보장 받으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러나 예측시스템이 제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예측은 항상 틀린다’는 진리를 피할 수는 없다. 우리의 눈이 그 이유를 비유적으로 일깨운다. 인간의 눈은 빛과 형태를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정교한 신체기관이지만, 눈의 모든 영역이 다 그렇지는 않다. 눈의 가운데 부분은 물체의 색과 세부 형태를 잘 인식하는 시력을 지녔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물체에만 국한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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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눈의 가장자리는 물체의 색과 형태를 제대로 감별하지 못하지만, 먼 곳에 있는 희미하고 분산된 빛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운전을 할 때 앞을 주시하면서도 양 옆에서 끼어드는 사물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눈이 영역별로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사진 기술은 고사하고 필름 사진기조차 없었던 과거에 천문학자들은 오로지 눈과 광학망원경만을 통해 천체를 관측하고 기록해야 했다. 그들은 주로 멀리 떨어진 성운과 혜성을 관측했는데, 그것들이 내는 빛이 매우 희미하기 때문에 잘 보려고 가운데로 초점을 모으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앞에서 말한 눈의 특성 때문이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보고자 하는 대상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간접 관측법을 쓰면 눈의 가장자리 부분을 통해 그 별의 색깔과 형태를 감지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대상이 희미할수록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불확실하게 보이는 미래를 복잡한 수치를 써서 예측할수록 미래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측은 눈의 가운데 부분처럼 1∼2년의 가까운 미래는 잘 맞힐지 몰라도 기업 흥망의 열쇠를 쥐고 있는 먼 미래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예측 기법의 대부분은 과거의 패턴을 미래에 투영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요즘과 같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환경에서 과거와 미래가 구조적으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앙코르와트로 여행을 갔을 때, 필자는 아직 땅거미가 걷히지 않은 새벽 5시에 사원을 배경으로 떠오를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붉은 해가 희미한 빛을 내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관광객들은 환호하며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팡팡 터졌을 때 필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일출을 찍겠다고 플래시를 터트려봤자 앞사람의 뒤통수만 찍히고 하늘은 까맣게 타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예측은 이와 같다. 플래시의 빛이 강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듯, 예측은 논리적으로 강력하지만 미래를 그려내는 데엔 힘을 못 쓴다.

불확실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미래를 보다 잘 감지하려면, 과거의 천문학자들이 일부러 물체를 똑바로 보지 않는 간접 관측법을 사용했듯이 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가능성들을 탐색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런 관점의 경영기법을 ‘시나리오 플래닝’이라 한다. 불확실성을 기초로 의미 있는 시나리오들을 도출하고 시나리오별로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전략 기법인 시나리오 플래닝은 요즘과 같이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점에 비로소 국내 대기업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측의 한계와 오류를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1970년 후반, 로열더치쉘이 단숨에 업계의 리더로 뛰어오른 이유는 시장을 잘 예측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나리오 플래닝을 통해 정유회사가 가진 교섭력이 OPEC 설립을 기점으로 산유국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정하여 미리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다른 정유사가 과거 데이터로 예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무조건 투자를 늘려갈 때 로열더치쉘은 숨고르기를 하며 힘을 비축했다.

마래가 불확실할수록 불확실함을 인정하라. 예측이 아니라 시나리오로 미래의 가능성을 관측하라. 그것이 불안하게 반짝이는 희미한 미래를 보다 잘 관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다.

(* 본 칼럼은 광주일보 2008년 8월 15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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