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7일(수) 경영일기 


얼마 전 새로 나온 영화 <원더우먼>을 봤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예뻐 보였던, 파란 눈빛과 환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하지만 상영시간 내내 ‘이게 뭐지?’라는 당혹스러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성 히어로물이지만 그간 나온 남성 히어로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순전히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다. 


영화 속 원더우먼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만 빼고는 악에 대항해 여전히 남성스러운 방식으로 싸우고 남성스럽게 영웅이 된다. 영화 속에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여성들만 사는 가상의 섬이라든지, 그곳에 남성이 불시착하는 장면이라든지, 섹시한 옷을 입고 ‘착하게’ 행동하는 주인공 여성의 모습 등이 그러했다. 결론적으로 영화 <원더우먼>은 ‘얼굴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게다가 능력까지 출중한 여자’, 원더우먼이라기보다 ‘수퍼우먼’을 바라는 남성들의 은밀한 욕구가 투영된 영화였다. 원더우먼 여주인공은 남성이 바라는 여성성이 강요된 캐릭터였다. 스토리의 느슨함과 편집의 엉성함이라는 단점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더우먼>에 실망한 채 영화관을 걸어 나오던 나는 진짜 원더우먼, 말 그대로 ‘놀라운 여성’은 몇 달 전에 봤던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의 세 여성이라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1960년대 NASA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했던 주인공들이 ‘여성인데다가 흑인이기까지 한’ 당시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우주선의 안전한 귀환이라는 난제를 풀어내는 과정이야말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자라는 집단조차 ‘지성 중심’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강력했다는(정도가 옅여졌을 뿐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것과 머리가 좋든 실력이 뛰어나든 흑인여성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세 여성 중에 어릴 적부터 두뇌가 뛰어나고 수학에 천부적인 능력을 나타낸, 그래서 남성 과학자들이 쩔쩔 매는 문제를 단숨에 풀어내고 압도하는 캐서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에 비해 흑인여성들로 이뤄진 계산부서의 리더 도로시와 흑인여성 최초의 엔지니어가 되는 메리의 이야기는 캐서린의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비중으로 다뤄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영화를 보는 내내 캐서린에 집중했고 영화를 본 후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살짝 고백하자면, 매력적인 외모의 자넬 모네가 역할한 메리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로시의 이야기가 기억의 수면 위로 자꾸 떠올랐다. 영웅의 등급이나 능력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세 흑인여성 중에 가장 놀라운 여성, 즉 원더우먼은 도로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나가다가 IBM으로부터 들여온,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운 전자계산기를 목격한다. 이제까지 우주선 발사에 필요한 수치 계산을 도맡았던 자신들을 대신할 기계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흑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도서관에서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FORTRAN)’ 책을 훔쳐 나온 그녀는 훔쳐도 되냐는 아들의 말에 ‘우리도 세금을 냈으니까 훔치 게 아니야’라고 당당히 말한다. 


도로시 본



두려워하는 흑인여성 계산원들에게 책을 들어 보이며 ‘이게 우리의 미래다’라고 말하고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도태될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하는 모습, IBM 엔지니어들도 쩔쩔 매는 전자계산기 사용을 보란듯이 해내는 장면, 포트란 언어를 익힌 계산원들을 이끌고 전자계산기가 가득한 방으로 ‘행진’하는 장면, 그래서 나중에는 백인여성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가르치는 자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인 모습은 왜 도로시가 진정한 원더우먼인지 곧바로 느끼게 한다. 



그녀는 변화를 인지하고,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혼자만 취하지 않고 동참하도록 만들어 변화의 물결에 함께 올라탔다. 캐서린과 메리 역시 놀라운 여성임에는 틀림없지만 둘은 ‘머리’가 뛰어난, 기본적으로 재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그런 ‘머리’는 없었지만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라고 말하며 변화를 뚫고 모두를 이끌어가는 도로시의 리더십이야말로 원더우먼의 칭호를 선사하기에 아깝지 않다.


영화 <원더우먼>은 주인공이 전쟁 중에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젖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끝까지 남성이 바라는 여성성, ‘지고지순함’을 은근 강요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히든 피겨스>는 세 여성의 실제 모습을 엔딩 타이틀과 함께 올리며 이 영화를 헌정한다. '진정한 원더우먼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 규정은 남성인 내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진정한 원더우먼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었고 앞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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