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속도가 빠르면 리스크가 커진다   

2012. 5. 2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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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15년 전쯤 방영되었던 역사 대하 드라마를 케이블 TV에서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물인데도 15년이라는 세월이 화면에서 여실히 느껴지더군요. 등장인물들의 대화 내용은 고어체라서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시청하는 동안 내내 화면 전환 속도와 대화의 흐름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이 대화를 마쳐도 바로 다른 사람에게 화면이 넘어가지 않았고 대화 사이의 공백도 길었습니다. 배우들이 말하는 속도도 왠지 느리기만 해서 어색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더군요.

그 이유는 진행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요즘 TV 프로그램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죠. 상황의 분위기와 배우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프로그램의 낮은 질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화면을 빠르게 전환시키는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심지어 시사 교양 프로그램들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 동승한 듯 합니다. 가뜩이나 TV가 시청자로 하여금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빼앗아 바보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지금처럼 1~2초에 한번 이상 바뀌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특히 뮤직 비디오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심함) 진짜로 바보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환경이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이끌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천천히 흘러가는 환경에 놓일 때보다 리스크가 큰 결정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제시 챈들러(Jesse J. Chandler)와 에밀리 프로닌(Emily Pronin)는 사람들이 생각의 속도를 빠르게 하도록 요구 받는 상황에 처하면 리스크 수용도가 높아진다는 점을 실험을 통해 규명했습니다.

그들은 컴퓨터 스크린 상에 "가스 스토브 위에 불씨가 계속 타오르고 있다."와 같은 문장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하고 참가자들에 크게 소리를 내어 따라 읽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문장을 느리게 보여주면서 따라 읽으라고 지시했죠. 여러 문장을 읽은 다음, 참가자들은 '풍선에 바람 넣기'라는 컴퓨터 게임에 임했습니다. 화면의 풍선을 여러 번 클릭하여 부풀어 오르도록 만드는 게임이었는데 과도하게 클릭하면 풍선이 터져 버려서 풍선 하나에 5센트씩 설정된 상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게임 결과, 문장을 빠르게 읽은 참가자들이 느리게 읽은 참가자들보다 풍선을 더 많이 터뜨렸고 평균 클릭수도 더 많았습니다(26.6회 대 20.6회). 빠르게 문장을 읽다보니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고 그 때문에 좀더 리스크가 큰 행동을 보였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효과를 재차 검증하기 위해 챈들러와 프로닌은 세 그룹의 학생들에게 화면 전환 속도가 다른 세 개의 동영상을 각각 보여준 후에 향후 6개월 이내에 리스크가 큰 여러 가지 행동들을 얼마나 할 것 같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화면 지속 시간이 0.75초에 불과하여 화면 전환 속도가 매우 빠른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은 마리화나 흡연, 술 마시기 게임, 콘돔을 쓰지 않은 성관계 등과 같이 리스크가 큰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참가자들은 느린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에 비해 리스크가 큰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덜 부정적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이 또한 환경의 변화 속도가 생각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의 빠른 속도는 리스크가 큰 행동을 유도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길들여질수록 리스크가 큰 행동을 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규명한 이 연구는 조직 구성원들의 행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금융시장의 변화, 정부 정책의 변화, 경쟁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등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급박하게 변할수록 직원들은 좀더 빠른 사고와 빠른 행동을 요구 받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구성원들이 찬찬히 앉아 상황을 숙고하거나 자료를 충분히 살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이 실험의 결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직원들의 경쟁 마인드를 고양하고 일하는 속도를 높여 빠르게 변하는 환경을 대처하겠다는 의도가 지나치면,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고 실패할 경우 손실이 큰 프로젝트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경계해야 하겠죠. 

상황 변화에 부화뇌동하려는 심리를 누르고 차분한 시선으로 환경을 조망하고 불확실성을 찾아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복잡하고 돈 많이 드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효과적일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생각 속도가 빨라지고 급박해진다고 느껴진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10분 정도 산책이라도 해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발생시킨 리스크가 언젠가 우리의 목을 죄어오지 못하도록 만들려면 말입니다.

생각의 속도를 늦추세요.


(*참고논문)
Fast Thought Speed Induces Risk T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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