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수요를 미리 알아챈 사람들   

2012. 3. 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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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년에 번역을 완료한 책 '디맨드(원제 : Demand)'가 편집을 거쳐 오늘 출간됐습니다. 꼼꼼하게 책을 만드느라 시간을 충분히 쏟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경영의 구루로 손꼽히는 에이드리언 슬라이워츠키입니다. 위대한 수요 창조자들이 몸소 실천한 수요 창조의 비밀 코드를 생생한 사례와 함께 제시하시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책 분량이 좀 있지만 사례가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기에 쉽게 읽히리라 생각됩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쓴 것으로서, '옮긴이의 말'로 책에 실렸습니다. 여러분에게 공유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맥도날드는 밀크셰이크의 판매를 늘리기 위해 마케팅 전략을 고심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밀크셰이크 시장을 여러 개의 세그먼트로 나눈 다음, 각 세그먼트에 해당하는 고객들을 초청하여 어떤 밀크셰이크를 좋아하는지를 묻는 통상적인 절차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다. 맥도날드는 고객들이 걸쭉한 것을 좋아하는지, 얼음이 많이 들어가서 차가운 것을 좋아하는지, 당도가 높은 것을 원하는지 등을 알아내는 것이 전략의 핵심 포인트라고 여겼다. 다시 말해 고객들이 밀크셰이크 자체의 어떤 특성을 좋아하는지 올바로 캐내기만 하면 보다 많은 고객들에게 선택되는 밀크셰이크를 출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밀크셰이크의 판매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제럴드 버스텔(Gerald Berstell)이란 마케터가 하루 종일 매장에 죽치고 앉아 어떤 사람들이 밀크셰이크를 구입하는지 관찰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버스텔은 특이하게도 밀크셰이크 판매의 40퍼센트가 사람들이 출근을 서두르는 이른 아침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밀크셰이크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드라이브 쓰루(Drive-thru)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매장에서 밀크셰이크를 사가지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하필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밀크셰이크를 살까?‘ 그는 밀크셰이크를 구입하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고객들은 출근을 위해 먼 거리를 자동차로 달리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거나 아침식사를 대신하기 위해 손에 잡고 먹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버스텔은 밀크셰이크의 특이한 판매 패턴이 밀크셰이크가 운전에 방해되지 않고 옷이나 운전대를 더럽히지 않으며 점심을 먹기 전까지 허기를 달래줄 만한 음식으로 가장 적당하다는 고객의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는 밀크셰이크라는 제품 자체의 특성에 집중하는 마케팅 전략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았다. 고객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평범한 원칙을 얼마나 망각했는지 새삼 반성했다.

고객의 관점에서 마케팅 전략을 수정한다면 이른 아침에 출근을 서두르는 자가용 승용차 통근자들이 좋아할 만한 밀크셰이크를 출시하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밀크셰이크에 과일을 첨가한다든지, 밀크셰이크가 쉽게 빨대를 통과하지 않도록 걸쭉하게 만들어서 자동차를 모는 내내 밀크셰이크를 즐기게 한다든지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메뉴판에는 똑같이 밀크셰이크라 쓰여 있다 해도 아침에 파는 것과 한낮에 파는 것의 특성을 다르게 해야 좋을 것이다. 한낮에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주부, 학생 등)이 밀크셰이크의 주요 대상이기 때문이다.

버스텔처럼 고객에 다가가 직접 이야기를 듣는 일은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데도 왜 곧잘 잊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저자들은 책의 여러 곳에서 ‘배짱’이라는 말을 언급한다. 조직의 리더 대부분은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번거롭거니와 짜증나는 일이라고 여긴다. 고객들은 아무리 잘 해줘도 불만을 표하기 일쑤이고 지나치게 세부적인 사항에 집중하는 바람에 돈과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욱이 고객의 말은 서로 모순일 때도 많아서 단순함과 간결함을 원하면서도 기능의 다양성을 요구하고, 어떨 때는 품질이 중요하다고 말하다가 어떨 때는 품질 대신 가격을 낮출 것을 바라니까 말이다. 그러니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면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옮긴이가 보건대 고객의 말을 들으려는 이런 배짱이야말로 수요 창조자가 갖춰야 할 기본기 중 최우선적인 조건으로 뽑을 만하다. 그런 배짱이 전제되어야 저자들이 이 책에서 ‘위대한 수요 창조자’들이 제품의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준수하는 6단계 프로세스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들은 제품이 고객을 끌어당기는 힘이 품질이나 가격에 있다고 보지 않는 진정한 배짱이 있다. 수요 창조자들은 미묘하고 형언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품에 온 힘을 기울인다. 자석이 쇳조각을 끌어당기듯 고객을 강하게 끄는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까지 만족할 줄 모른다. 매력적인 제품이야말로 고객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배짱을 상실하고 적당한 품질과 적당한 가격으로 타협하는 순간,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로 아쉬울 것 없는 제품으로 인식되고 수요 창조의 꿈은 경쟁사의 것이 되고 만다.

둘째, 수요 창조자들은 고객이 가진 고충에 초점을 맞춘다. 고객이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고충을 한 발 앞서 찾아내고 그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흩어진 가치를 한데 모으고 분산된 프로세스를 정렬시키는 일에 집중한다. 상품, 서비스, 정보, 기타 자원 등을 각각의 점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면서 현재의 고충 지도를 개선된 고충 지도로 다시 그려낸다. 이러한 과정에도 배짱이 필요한데, 기존의 프로세스, 조직, 인력, 기술 등을 제로베이스에서 검토하고 때에 따라서 뒤집어엎어야 하는 자기 부정과 창조적 파괴의 단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재앙의 수준이라고 비난 받는 미국의 헬스캐어 시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캐어모어를 보면 고객의 고충을 해결하려는 리더의 배짱이 국가적으로도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셋째, 수요 창조자가 되려면 제품의 배경 스토리를 확보하려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제품 하나만으로 수요의 물꼬를 트지는 못한다. 배경 스토리가 존재하거나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배짱 있는 리더가 할 일이 있다. 넷플릭스의 성공이 미국 우편국의 우편 배달 서비스라는 배경 스토리에서 가능했고, 애플의 성공은 아이튠즈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로부터 잉태된 것이다. 수요 창조를 위해 제품 이외에 무엇을 관여시킬지,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어떤 인프라를 구축할지, 그리고 그 인프라를 어떻게 개선할지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넷째, 배짱이 있는 리더들이 수요를 촉발시킬 방아쇠를 마침내 찾아낼 수 있다. 네스프레소의 수요 폭발은 제품 자체보다는 ‘직접 체험’이라는 고객과의 관계 속에서 나왔다. 이것 역시 고객과 직접 대면하며 방아쇠를 찾아내려는 리더의 두둑한 배짱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아쇠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네스프레소가 1980년대 중반에 시장에 첫선을 보였지만 ‘직접 체험’이라는 방아쇠를 찾아내기까지 10년이나 걸린 것만 봐도 그렇다.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하며 방아쇠 탐색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제품 출시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제품의 출시 대부분에 무관심하다. 제품의 출시로 제품의 진화가 멈춰서는 안 된다. 시장과 고객으로 둘러싸인 생태계 속에서 제품을 적응시키는 강력한 ‘진화 프로세스’를 작동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한때 업계를 호령했으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무너져 버린 K마트, 코닥, 폴라로이드 등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섯째, 고객들을 ‘하나의 통’으로 보려는 스스로의 관성을 깨뜨릴 배짱이 있어야 한다. 개별 고객은 모두 각자의 니즈와 고충을 가지고 있다. 공급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리더들은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고객들 간의 편차를 싫어하고 ‘평균적 고객’이란 허황된 개념에 기댄다고 저자들은 꼬집는다. 위대한 수요 창조자들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런 편차를 좋아한다. 또한 수요 창출에 기여하는 고객들에 집중하고 그렇지 못한 고객들은 과감하게 무시한다. 모든 고객을 다 상대하려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품을 내놓는 배짱 없는 리더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저자들은 수요 창조에 있어 리더와 조직이 실천해야 할 6가지 덕목에 그치지 않고 시각을 확대하여 사회경제적으로 그들에게 훌륭한 ‘재료’의 공급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쇼클리의 트랜지스터가 현대의 정보사회의 근간이 됐듯이 기업과 기업 생태계의 혁신은 과학적 탐구라는 ‘엔진’에 의해 좌우되고, 그 엔진이 국가와 사회의 경제적 미래를 규정하는 데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지적한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씁쓸함과 함께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적인 연구와 기초 투자를 외면하고 오직 응용 기술과 단기적 성과라는 달콤한 열매만 따먹으려 하는 요즘의 분위기가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결국 세계 시장에서의 적응력을 상실시키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까닭이다. 저자들이 과학적 발견이야말로 수요 창조의 거대한 불꽃이라고 표현하며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한 이유를 기업의 리더와 국가 지도자들은 새겨야 할 것이다.

흔히 수요를 창조하려면 리더에게 예술적 기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한 수요 창조의 비밀을 읽고 넘어가는 자들에게는 옳은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 하나씩 적용하면서 배짱과 인내심을 갖고 밀고 나가는 자들에게는 옳지 않은 말이다. 예술적 기교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얻어내는 선물임을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수요 창조자들이 역사(役事)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라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썼다. 하지만 이 책을 먼저 들여다보라고 옮긴이는 권한다. 수요 창조의 여정에서 길을 잃을 때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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